룡정시 동성용진 석정촌에는 ‘소사양왕’으로 불리우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이 마을 당지부 서기 박철룡이다. 풋풋한 젊은 류학생으로부터 존경받는 촌마을의 ‘소사양왕’으로 되기까지는 우직한 걸음으로 찍어온 18년 세월의 부지런한 발자국이 또렷이 찍혀있다.
박철룡의 인생은 그야말로 도전과 분투로 넘치는 전기적인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여년 전, 박철룡은 가슴 부푼 동경의 마음을 안고 류학의 길에 올랐다. 밝은 미래를 꿈 꾸며 떠난 류학길이였지만 무거운 경제압력으로 인해 중도에서 학업을 접었다. 생계를 위해 박철룡은 부득이 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수입은 많은 편이였지만 이 길이 장구지책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던 박철룡은 2005년, 결연히 귀국하여 한 외자기업에 입사해 번역사업을 맡았다. 하지만 박철룡의 꿈은 그런 안일함에 그치지만은 않았다.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기보다는 스스로 창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시도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2006년, 박철룡은 짧은 회사생활을 접고 고향 연변으로 돌아와 꿈에도 그리던 창업의 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친구의 소개를 통해 오미자 재배 전망이 밝다는 정보를 알게 된 박철룡은 3만원의 돈을 투입해 룡정시 동성용진에서 땅 2헥타르를 도급맡아 오미자를 심었다. 오미자 재배에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한편 박철룡은 기타 창업 항목에도 눈길을 돌렸다. “창업 항목을 연구하던 끝에 우리 연변소 시장이 전망이 밝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습니다.”
오미자 재배에서 성공의 열매를 맛보기도 전에 연변소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그는 결단성 있게 오미자를 몽땅 뽑아버리고 자신이 외국에서 고생스레 번 돈 20만원을 투자해 연변소 30여마리를 샀고 소사양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허름한 주택, 마당 하나와 비닐하우스 하나가 그의 초창기 ‘소사양장’이였다.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는 그는 소사양을 시작하면서 손에 쩍하면 물집이 생겼으며 결국엔 굳은 장알이 박히고 말았다.
잘살아보려는 꿈을 가지고 시작한 그의 창업길은 결코 탄탄대로는 아니였다. 찬바람이 뼈 속까지 스며드는 어느 겨울, 박철룡은 소여물을 마련하기 위해 눈보라를 무릅쓰고 사륜차를 몰고 부근의 마을에 가서 소먹이를 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무게를 이기지 못한 사륜차가 그만 두텁게 쌓인 눈 속에 빠지고 말았다. 박철룡은 함께 갔던 로동자 두명과 있는 힘을 다해 눈 속에서 차를 끌어내려고 시도했다. 세시간이 지나도록 애써보았지만 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세 사람은 이미 몸이 꽁꽁 얼어 움직이기조차 힘들게 되였다. “제가 20분 넘게 걸어 부근의 마을에 가서 촌민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겨우 차를 빌려 눈 속에 빠진 사륜차를 끌어냈습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굽이 젖어든다는 박철룡, 잊지 못할 추운 겨울날의 그 사연은 박철룡에게 창업의 길이란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과정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했다.
또 어느 한번, 연변소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박철룡은 4만원 돈을 빌려 연변소 암컷 세마리를 사들였다. 하지만 그 희열을 만끽하기도 전에 그는 또 심한 타격을 견뎌내야만 했다. 암소 세마리가 모두 독성 옥수수를 먹고 죽었던 것이다. 4만원의 돈을 허망 날리게 된 박철룡은 눈앞에 굳어져있는 암소 세마리를 바라보며 통탄을 금치 못했다. “그땐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암소 세마리로 송아지를 키워보려 했는데 게도 구럭도 다 잃고 말았습니다.” 소사양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 박철룡이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양기술을 잘 몰랐던 탓에 태여난 지 얼마 안되여 죽는 소들이 많았다. 다행히 목축수의소 사업일군이 주동적으로 찾아와 도움을 주었고 박철룡 자신도 부지런히 소사양 기술을 학습하면서 소사양장은 점차 궤도에 들어서게 되였다. 매 한번의 좌절은 그의 가슴을 아프게 긁었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소사양 기술이 날따라 성숙되고 사양규모가 나날이 확대되면서 박철룡은 특색 있고 맛이 있는 소고기제품을 생산해야만 치렬한 시장경쟁에서 발을 붙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였다.
마음만 먹으면 해내고야 마는 성미인 그는 자체생산, 자체공급, 자체판매의 양식산업사슬을 기획하고 바로 밀어붙였다. 2010년, 박철룡은 연길서시장에서 작은 매대 하나를 세맡고 자체로 생산한 소고기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장사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어떤 날에는 열근 정도 밖에 팔지 못했습니다. 안해는 속을 태우다 못해 입에 물집이 다 터졌습니다.” 안해를 위로하기 위해 박철룡은 몰래 몇몇 친구한테 련락해 자신의 매대에 가서 소고기를 사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소고기 판매량을 늘이기 위해 박철룡과 그의 안해는 새벽 네시면 아침시장에 나가 매대를 벌였고 아침시장이 끝나면 서시장 매대에 나가 고기를 팔았다. 2년째 되던 2012년 즈음, 연변소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 시점을 기회로 생각한 박철룡은 ‘전문판매점’을 열고 소고기를 전문 판매할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한집 두집 세집… 오늘날 박철룡의 연변소 전문판매점은 네집으로 늘어났고 년간판매액은 2000만원에 달하게 되였다.
성공과 실패, 좌절과 희열을 번갈아 맛보았던 분투의 길에서 시종 고향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박철룡은 치부의 선줄군이 되여 고향 사람들을 이끌고 함께 발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21년, 박철룡은 정식으로 석정촌당지부 서기 직을 맡게 되였다. 촌민들을 이끌고 연변소 산업을 발전시켜 수입을 증가하고 치부를 실현하려고 결심한 박철룡은 길림건축대학의 도움으로 룡정시 석금석축목경제전문합작사를 세웠다. 합작사는 ‘룡두기업+합작사+농호’ 위탁사양 모식을 부단히 탐색하면서 더욱 긴밀한 리익련결 기제를 세웠는데 이는 농호의 사양 모험성을 낮추어주고 새로운 치부의 길을 열어주었다. 지금까지 합작사에는 25개 농호가 참여했다. “소를 합작사에 위탁해 사양하는데 사료값만 지불하면 되여 시간도 절약하고 힘도 적게 듭니다. 소가 병이 나면 합작사에서는 진의 목축수의소의 수의를 청해 치료해줍니다.” 64세 되는 마계화는 태여난 지 두달 되는 송아지를 어루쓸며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해 그는 소사양으로 수입 9만원을 올렸고 살림이 나날이 펴이게 되였다. 박철룡은 촌의 사양호들과 생산판매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해 사료 배합방법과 사양기술을 제공해주었으며 시장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연변소를 수매하여 공동발전을 실현했다.
현재, 박철룡이 이끄는 룡정시목락목축업유한회사의 소는 최초의 30여마리로부터 800여마리로 늘어났다. 지난해 회사는 ‘연변소’ 지리표식증명상표의 사용권까지 획득했다.
20년의 세월, 박철룡은 부지런한 두 손으로 치부의 대로를 열었다. 그는 우직한 성품과 책임감 있는 도전정신으로 빛나는 세월의 한페지를 엮었고 향촌진흥 사업에 새로운 희망을 주입했으며 따뜻한 해살마냥 촌민들의 마음을 덥혀주고 있다.
박철룡의 인생은 그야말로 도전과 분투로 넘치는 전기적인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여년 전, 박철룡은 가슴 부푼 동경의 마음을 안고 류학의 길에 올랐다. 밝은 미래를 꿈 꾸며 떠난 류학길이였지만 무거운 경제압력으로 인해 중도에서 학업을 접었다. 생계를 위해 박철룡은 부득이 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수입은 많은 편이였지만 이 길이 장구지책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던 박철룡은 2005년, 결연히 귀국하여 한 외자기업에 입사해 번역사업을 맡았다. 하지만 박철룡의 꿈은 그런 안일함에 그치지만은 않았다.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기보다는 스스로 창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시도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2006년, 박철룡은 짧은 회사생활을 접고 고향 연변으로 돌아와 꿈에도 그리던 창업의 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친구의 소개를 통해 오미자 재배 전망이 밝다는 정보를 알게 된 박철룡은 3만원의 돈을 투입해 룡정시 동성용진에서 땅 2헥타르를 도급맡아 오미자를 심었다. 오미자 재배에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한편 박철룡은 기타 창업 항목에도 눈길을 돌렸다. “창업 항목을 연구하던 끝에 우리 연변소 시장이 전망이 밝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습니다.”
오미자 재배에서 성공의 열매를 맛보기도 전에 연변소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그는 결단성 있게 오미자를 몽땅 뽑아버리고 자신이 외국에서 고생스레 번 돈 20만원을 투자해 연변소 30여마리를 샀고 소사양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허름한 주택, 마당 하나와 비닐하우스 하나가 그의 초창기 ‘소사양장’이였다.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는 그는 소사양을 시작하면서 손에 쩍하면 물집이 생겼으며 결국엔 굳은 장알이 박히고 말았다.
잘살아보려는 꿈을 가지고 시작한 그의 창업길은 결코 탄탄대로는 아니였다. 찬바람이 뼈 속까지 스며드는 어느 겨울, 박철룡은 소여물을 마련하기 위해 눈보라를 무릅쓰고 사륜차를 몰고 부근의 마을에 가서 소먹이를 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무게를 이기지 못한 사륜차가 그만 두텁게 쌓인 눈 속에 빠지고 말았다. 박철룡은 함께 갔던 로동자 두명과 있는 힘을 다해 눈 속에서 차를 끌어내려고 시도했다. 세시간이 지나도록 애써보았지만 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세 사람은 이미 몸이 꽁꽁 얼어 움직이기조차 힘들게 되였다. “제가 20분 넘게 걸어 부근의 마을에 가서 촌민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겨우 차를 빌려 눈 속에 빠진 사륜차를 끌어냈습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굽이 젖어든다는 박철룡, 잊지 못할 추운 겨울날의 그 사연은 박철룡에게 창업의 길이란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과정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했다.
또 어느 한번, 연변소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박철룡은 4만원 돈을 빌려 연변소 암컷 세마리를 사들였다. 하지만 그 희열을 만끽하기도 전에 그는 또 심한 타격을 견뎌내야만 했다. 암소 세마리가 모두 독성 옥수수를 먹고 죽었던 것이다. 4만원의 돈을 허망 날리게 된 박철룡은 눈앞에 굳어져있는 암소 세마리를 바라보며 통탄을 금치 못했다. “그땐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암소 세마리로 송아지를 키워보려 했는데 게도 구럭도 다 잃고 말았습니다.” 소사양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 박철룡이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양기술을 잘 몰랐던 탓에 태여난 지 얼마 안되여 죽는 소들이 많았다. 다행히 목축수의소 사업일군이 주동적으로 찾아와 도움을 주었고 박철룡 자신도 부지런히 소사양 기술을 학습하면서 소사양장은 점차 궤도에 들어서게 되였다. 매 한번의 좌절은 그의 가슴을 아프게 긁었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소사양 기술이 날따라 성숙되고 사양규모가 나날이 확대되면서 박철룡은 특색 있고 맛이 있는 소고기제품을 생산해야만 치렬한 시장경쟁에서 발을 붙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였다.
마음만 먹으면 해내고야 마는 성미인 그는 자체생산, 자체공급, 자체판매의 양식산업사슬을 기획하고 바로 밀어붙였다. 2010년, 박철룡은 연길서시장에서 작은 매대 하나를 세맡고 자체로 생산한 소고기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장사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어떤 날에는 열근 정도 밖에 팔지 못했습니다. 안해는 속을 태우다 못해 입에 물집이 다 터졌습니다.” 안해를 위로하기 위해 박철룡은 몰래 몇몇 친구한테 련락해 자신의 매대에 가서 소고기를 사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소고기 판매량을 늘이기 위해 박철룡과 그의 안해는 새벽 네시면 아침시장에 나가 매대를 벌였고 아침시장이 끝나면 서시장 매대에 나가 고기를 팔았다. 2년째 되던 2012년 즈음, 연변소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 시점을 기회로 생각한 박철룡은 ‘전문판매점’을 열고 소고기를 전문 판매할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한집 두집 세집… 오늘날 박철룡의 연변소 전문판매점은 네집으로 늘어났고 년간판매액은 2000만원에 달하게 되였다.
성공과 실패, 좌절과 희열을 번갈아 맛보았던 분투의 길에서 시종 고향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박철룡은 치부의 선줄군이 되여 고향 사람들을 이끌고 함께 발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21년, 박철룡은 정식으로 석정촌당지부 서기 직을 맡게 되였다. 촌민들을 이끌고 연변소 산업을 발전시켜 수입을 증가하고 치부를 실현하려고 결심한 박철룡은 길림건축대학의 도움으로 룡정시 석금석축목경제전문합작사를 세웠다. 합작사는 ‘룡두기업+합작사+농호’ 위탁사양 모식을 부단히 탐색하면서 더욱 긴밀한 리익련결 기제를 세웠는데 이는 농호의 사양 모험성을 낮추어주고 새로운 치부의 길을 열어주었다. 지금까지 합작사에는 25개 농호가 참여했다. “소를 합작사에 위탁해 사양하는데 사료값만 지불하면 되여 시간도 절약하고 힘도 적게 듭니다. 소가 병이 나면 합작사에서는 진의 목축수의소의 수의를 청해 치료해줍니다.” 64세 되는 마계화는 태여난 지 두달 되는 송아지를 어루쓸며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해 그는 소사양으로 수입 9만원을 올렸고 살림이 나날이 펴이게 되였다. 박철룡은 촌의 사양호들과 생산판매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해 사료 배합방법과 사양기술을 제공해주었으며 시장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연변소를 수매하여 공동발전을 실현했다.
현재, 박철룡이 이끄는 룡정시목락목축업유한회사의 소는 최초의 30여마리로부터 800여마리로 늘어났다. 지난해 회사는 ‘연변소’ 지리표식증명상표의 사용권까지 획득했다.
20년의 세월, 박철룡은 부지런한 두 손으로 치부의 대로를 열었다. 그는 우직한 성품과 책임감 있는 도전정신으로 빛나는 세월의 한페지를 엮었고 향촌진흥 사업에 새로운 희망을 주입했으며 따뜻한 해살마냥 촌민들의 마음을 덥혀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