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시 남평진 처창학교는 변경학교로서 학교에는 30여명의 교직원이 있는데 그중 당원교원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20여명의 학생중 반수 이상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생활하는 류재아동이다. 대학교를 갓 졸업한 나는 행운스럽게 처창학교 대가정에 합류했는데 어느덧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학교 당조직의 지도와 보살핌으로 2018년 5월에 영광스럽게 공산당원으로 되였다. 반석같이 견고한 당지부 당원교원들의 초심과 신념 속에서 나는 저도 모르게 감화되고 있었다.
향촌은 옥토이다. 나도 이 옥토에 발을 붙이고 자라나는 만물중의 하나인 듯싶다. 지도부, 동료, 학생들은 서로 잘 어울리고 있으며 수업시간이면 함께 지식의 바다에서 헤염치고 방과후면 함께 꽃과 풀을 심으며 누구나 할 것 없이 교정을 아름답게 가꾸어가고 있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아름다운 교정에는 두터운 눈으로 뒤덮인다. 누가 지령을 내릴 필요도 없이 교직원들은 아침 일찍 등교하여 비자루로 눈을 쓰느라 땀벌창이가 된다. 교장, 교무처 주임 할 것 없이 우리는 함께 로동을 하면서 아침 인사를 나누고 교수활동을 토론하며 자신의 작은 수확과 기쁜 심정을 공유한다. 누구도 춥다거나 힘들다는 불평 한마디 없다. 행복한 표정에서 나오는 따스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속에서 한줄기 따뜻한 기운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옛적에 스승의 덕이란 공자가 자신의 언행으로 제자들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였고 류우석의 “방림의 새잎은 진잎을 재촉하고 흐르는 물의 앞물결이 뒤물결을 양보”하는 렴결의 가르침이였으며 순자의 “끝까지 노력하면 금석에도 조각할 수 있다”는 꾸준한 노력이였다. 오늘날 스승의 덕은 처창학교에서 전체 교원들이 변방의 향촌학교에 뿌리를 내려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며 운명을 개변시키기 위해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른아침의 해살을 마주하며 교정에 들어서고 수많은 밤 별과 동무하며 교수의 엄밀함을 추구하기 위해 밤을 지새웠다. 그들은 학생을 양성하고 교정을 위해 본보기 역할을 하였고 몇년 지어는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꾸준히 탐색하며 향촌학교의 발전에 버팀목이 되였다.
당지부 당원교원들은 추우나 더우나 매일 50여킬로메터의 통근길의 고달픔을 이겨내면서 정상적인 교수임무외에 많은 로동임무도 도맡고 있지만 모두가 피곤한 줄 모르며 즐거워하고 있다. 교무처 호주임은 처창학교에서 만 20년을 사업했다. 20년 사이에 시내 학교로 일터를 옮길 기회가 몇번 찾아왔지만 그는 번마다 마다했다. “이곳은 산도 좋고 물도 좋지만 더우기는 아이들이 좋습니다.” 처창학교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에도 정을 담고 교정내 물건 하나, 일 하나에도 마음 다하는 호주임의 소박하고 진정성 있는 말이다.
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류주임은 첫번째 일터가 처창학교였다. 그녀는 수십년을 하루처럼 제일 먼저 학교에 와서 학생들을 맞이하며 친자식처럼 보듬어주었다. 어느 날 방과후, 소나기가 내리기 직전이라 날씨가 급변하였다. 학교와 비교적 멀리 떨어진 북골에 살고 있는 몇명의 학생들이 아직도 하학길에 있을 것이라 짐작한 그녀는 부랴부랴 비옷을 챙기고 우산을 몇개 빌려 학생들의 집 방향으로 뒤쫓아갔다. 류주임은 한시간이 넘은 후에야 온몸이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돌아왔다. 학생들을 무사히 집까지 바래다주고 오는 길이였다. 그녀가 퇴직하던 그해 4월이였다. 25세 나는 그녀의 아들이 불행하게 뇌종양을 앓아 치료를 했으나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류주임은 아들의 후사를 처리한 뒤 비통의 마음을 추스리고 곧 일터에 돌아와 퇴직하는 6월까지 여열을 빛냈다.
처창학교 당조직의 보살핌 속에서 나는 사상토대를 더욱 든든히 하였고 시야를 더욱 넓혔으며 흉금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이 당원교원들처럼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묵묵히 일터에서 빛을 내고 있을 것이다. 청년 당원교원로서 어깨에 책임을 짊어지고 내공을 련마하며 신념을 견정히 하고 교육정감을 깊이 뿌리 박으며 덕을 쌓아 인재를 양성하련다. 향촌 당원교원의 사상감정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할 것이며 내가 사랑하는 교육사업에서 용감히 앞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할 것이다.
향촌은 옥토이다. 나도 이 옥토에 발을 붙이고 자라나는 만물중의 하나인 듯싶다. 지도부, 동료, 학생들은 서로 잘 어울리고 있으며 수업시간이면 함께 지식의 바다에서 헤염치고 방과후면 함께 꽃과 풀을 심으며 누구나 할 것 없이 교정을 아름답게 가꾸어가고 있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아름다운 교정에는 두터운 눈으로 뒤덮인다. 누가 지령을 내릴 필요도 없이 교직원들은 아침 일찍 등교하여 비자루로 눈을 쓰느라 땀벌창이가 된다. 교장, 교무처 주임 할 것 없이 우리는 함께 로동을 하면서 아침 인사를 나누고 교수활동을 토론하며 자신의 작은 수확과 기쁜 심정을 공유한다. 누구도 춥다거나 힘들다는 불평 한마디 없다. 행복한 표정에서 나오는 따스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속에서 한줄기 따뜻한 기운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옛적에 스승의 덕이란 공자가 자신의 언행으로 제자들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였고 류우석의 “방림의 새잎은 진잎을 재촉하고 흐르는 물의 앞물결이 뒤물결을 양보”하는 렴결의 가르침이였으며 순자의 “끝까지 노력하면 금석에도 조각할 수 있다”는 꾸준한 노력이였다. 오늘날 스승의 덕은 처창학교에서 전체 교원들이 변방의 향촌학교에 뿌리를 내려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며 운명을 개변시키기 위해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른아침의 해살을 마주하며 교정에 들어서고 수많은 밤 별과 동무하며 교수의 엄밀함을 추구하기 위해 밤을 지새웠다. 그들은 학생을 양성하고 교정을 위해 본보기 역할을 하였고 몇년 지어는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꾸준히 탐색하며 향촌학교의 발전에 버팀목이 되였다.
당지부 당원교원들은 추우나 더우나 매일 50여킬로메터의 통근길의 고달픔을 이겨내면서 정상적인 교수임무외에 많은 로동임무도 도맡고 있지만 모두가 피곤한 줄 모르며 즐거워하고 있다. 교무처 호주임은 처창학교에서 만 20년을 사업했다. 20년 사이에 시내 학교로 일터를 옮길 기회가 몇번 찾아왔지만 그는 번마다 마다했다. “이곳은 산도 좋고 물도 좋지만 더우기는 아이들이 좋습니다.” 처창학교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에도 정을 담고 교정내 물건 하나, 일 하나에도 마음 다하는 호주임의 소박하고 진정성 있는 말이다.
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류주임은 첫번째 일터가 처창학교였다. 그녀는 수십년을 하루처럼 제일 먼저 학교에 와서 학생들을 맞이하며 친자식처럼 보듬어주었다. 어느 날 방과후, 소나기가 내리기 직전이라 날씨가 급변하였다. 학교와 비교적 멀리 떨어진 북골에 살고 있는 몇명의 학생들이 아직도 하학길에 있을 것이라 짐작한 그녀는 부랴부랴 비옷을 챙기고 우산을 몇개 빌려 학생들의 집 방향으로 뒤쫓아갔다. 류주임은 한시간이 넘은 후에야 온몸이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돌아왔다. 학생들을 무사히 집까지 바래다주고 오는 길이였다. 그녀가 퇴직하던 그해 4월이였다. 25세 나는 그녀의 아들이 불행하게 뇌종양을 앓아 치료를 했으나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류주임은 아들의 후사를 처리한 뒤 비통의 마음을 추스리고 곧 일터에 돌아와 퇴직하는 6월까지 여열을 빛냈다.
처창학교 당조직의 보살핌 속에서 나는 사상토대를 더욱 든든히 하였고 시야를 더욱 넓혔으며 흉금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이 당원교원들처럼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묵묵히 일터에서 빛을 내고 있을 것이다. 청년 당원교원로서 어깨에 책임을 짊어지고 내공을 련마하며 신념을 견정히 하고 교육정감을 깊이 뿌리 박으며 덕을 쌓아 인재를 양성하련다. 향촌 당원교원의 사상감정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할 것이며 내가 사랑하는 교육사업에서 용감히 앞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할 것이다.
(필자는 화룡시 남평진 처창학교 교원)
리문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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