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는 자치주 창립 70돐 되는 해였다. 자치주의 번영과 발전 속에서 함께 숨 쉬면서 분투해온 자신을 돌이켜보면 가슴이 설레인다. 아, 은혜로운 당이여! 내 잊지 못할 고향이여!
1955년에 나는 안도현 만보향에서 태여났는데 네살 적에 하루밤새로 ‘소아마비증’에 걸려 장애인으로 되고 말았다.
부모님은 나를 고향과 나라의 유용한 인재로 키우기 위해 걷지도 못하는 나를 바로 학교에 붙였다. 겨울이면 부모님 혹은 선생님들한테 업히워 학교를 다녔고 여름이면 지나가던 소수레군들이 나를 보면 태워주었다. 정말 인정 많은 고향사람들이였다.
고중을 졸업한 나는 장애인이다 보니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하다가 스물여섯살에야 만보량식관리소에 배치받았다. 그 이듬해에 결혼했는데 몇년 뒤인 1987년에 쓰디쓴 혼인을 결속짓고 말았다.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보려 했던 욕망이 물 만난 모래섬처럼 무너지자 처음에는 헤여나올 수 없는 슬픔의 바다에서 헤매였다. 그러나 나는 인차 정신을 가다듬었다. 숨 막히고 가슴 찢기는 생활의 역경을 오히려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당당한 자태로 삶의 무대에서 인생악보를 그려가고 싶었다. 하여 선택한 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나에게 인생의 꿈을 심어준 고향을 글로 자랑하고 싶었고 어릴 적 사랑을 베풀어준 고향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글로써 구가하고 싶었다.
1988년 1월, 나는 연변일보사에서 조직한 ‘신문집필 강습반’에 신청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강습반에 참가하라는 통지가 왔다. 이제 강습을 거치면 신문사의 통신원이 될 수 있다니, 나는 가슴이 활랑댔다. 그런데 그때는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서 한번씩 연길에 다녀오자면 쉽지 않았다.
“불편한 다리로 길에 나서기도 힘들 텐데 어려운 선택을 했구나.”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친구의 걱정이 고맙긴 했지만 나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내 고향의 새로운 변화와 좋은 사람과 좋은 일을 많이 써내려는 욕망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강습반은 석달이 한기였다. 나는 휴식일에 당직을 서기도 하고 다른 일도 하는 것으로 출근시간을 메워가며 강습반에 참가했다.
그해 5월초에 나의 첫 글이《연변일보》에 실렸다. 처음으로 내 이름이 박힌 신문을 받아쥔 나는 눈굽이 젖어났다. 이 어찌 한편의 글이라고만 하겠는가? 그것은 한 장애인 녀성이 심신의 검은 그림자와의 박투였고 삶에 대한 의욕이였다.
낮이면 출근하고 저녁이면 나는 자주 취재에 나섰다. 고향에는 정겨운 이야기가 많았고 인정미가 찰찰 넘쳐 쓸 소재가 샘물 솟듯 솟아나와 나는 도무지 앉아있지 못했다.
시골마을은 가로등이 없어 나는 손전등을 켜고 나섰다. 그래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가 있었다. 어느 한번은 잘못 넘어져 코등에 상처가 나기도 했다.
“에그에그 어서 그만둬. 이런 일은 네가 하기 힘들구나. 괜히 큰 일이 날라구.” 어머니가 걱정스레 말했지만 그만한 일에 물러설 내가 아니였다. 무슨 일이든 대가를 필요로 하는데 하물며 글 쓰는 일은 수고가 더 말할 수 없이 많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도 부지런히 글을 써보냈더니 여러 신문사에서 믿어주고 인정해주었다. 1991년 음력설을 며칠 앞두고 흑룡강신문사에서 원고 부탁이 왔다. 음력설 전에 나갈 원고이니 속히 보내달라는 것이였다. 그날 나는 퇴근하자 바람으로 금광촌에 가서 취재했다. 취재가 끝난 그날 저녁으로 원고를 쓰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글이 마음에 들어서야 나는 자리에 누웠다. 그때는 이미 저녁 열두시였다. 이튿날 나는 우체국에 가서 속달우편으로 보냈다. 그 글은 마침내 음력설 신문에 실렸다. 나는 개선장군마냥 마음이 뿌듯해났다.
그렇게 한편 또 한편의 글이 신문에 실릴 때마다 그 즐거움은 무엇으로 형용할 수 없었다. 쓰고 보내고를 반복하는 무수한 나날들이 흘러갔다. 그 흐름 속에서 나는 그 어떤 역경도 이겨내는 강자의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악장에 인생의 구성진 노래를 엮어가는 자신을 알게 되였고 날로 성숙되면서 넓어지는 자기마당 한복판에 굳어지는 하나의 투명한 신념과 함께 좁은 가슴을 불태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듬해부터 나는《연변일보》,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흑룡강신문》등 매체에서 수차례 우수통신원으로 선정되였다.
수많은 신문원고외에도 소설, 수필, 동화 등 많은 문학작품도 발표했는데 내가 쓴 현대이야기집《밤중에 찾아온 남자》, 동시집 《꿈나무 사랑나무》, 자서전《비운의 마라토너》가 출간되였다. 2003년에 연변작가협회에 가입하고 2006년부터 2016년까지 안도현정협 위원으로 활약했으며 2012년에는 ‘안도현 10대 도덕모범’이란 영예를 안게 되였다. 이 밖에도 각종 글쓰기응모에서 여러차례 수상하게 되였다. 매번 절뚝대는 걸음으로 수상대에 오를 때면 나는 눈굽이 젖어들군 했다. 그 시각에 눈에서 반짝이는 눈물은 기쁨과 행복의 상징이였고 고향에 대한 감사함이기도 했다. 나는 글쓰기에서 생의 아름다움을 알고 어엿한 자신을 찾게 되였으며 눈물 역시 높은 차원에서의 장엄한 향수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짙은 흑갈색의 그늘 때문에 직사광선을 받는 부분이 더욱 빛나듯이 어려웠던 순간들을 잘 극복하고 삶 전체와 조화를 이루면서 열심히 분발해온 나에게는 승리의 월계관이 씌워져있다. 이 월계관은 바로 고향이 씌워준 것이다. 어머니가 날 낳았지만 고향은 나를 어엿한 작가로 키워주었다. 그래서 고향에 머리숙여 인사 올린다.
1955년에 나는 안도현 만보향에서 태여났는데 네살 적에 하루밤새로 ‘소아마비증’에 걸려 장애인으로 되고 말았다.
부모님은 나를 고향과 나라의 유용한 인재로 키우기 위해 걷지도 못하는 나를 바로 학교에 붙였다. 겨울이면 부모님 혹은 선생님들한테 업히워 학교를 다녔고 여름이면 지나가던 소수레군들이 나를 보면 태워주었다. 정말 인정 많은 고향사람들이였다.
고중을 졸업한 나는 장애인이다 보니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하다가 스물여섯살에야 만보량식관리소에 배치받았다. 그 이듬해에 결혼했는데 몇년 뒤인 1987년에 쓰디쓴 혼인을 결속짓고 말았다.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보려 했던 욕망이 물 만난 모래섬처럼 무너지자 처음에는 헤여나올 수 없는 슬픔의 바다에서 헤매였다. 그러나 나는 인차 정신을 가다듬었다. 숨 막히고 가슴 찢기는 생활의 역경을 오히려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당당한 자태로 삶의 무대에서 인생악보를 그려가고 싶었다. 하여 선택한 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나에게 인생의 꿈을 심어준 고향을 글로 자랑하고 싶었고 어릴 적 사랑을 베풀어준 고향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글로써 구가하고 싶었다.
1988년 1월, 나는 연변일보사에서 조직한 ‘신문집필 강습반’에 신청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강습반에 참가하라는 통지가 왔다. 이제 강습을 거치면 신문사의 통신원이 될 수 있다니, 나는 가슴이 활랑댔다. 그런데 그때는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서 한번씩 연길에 다녀오자면 쉽지 않았다.
“불편한 다리로 길에 나서기도 힘들 텐데 어려운 선택을 했구나.”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친구의 걱정이 고맙긴 했지만 나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내 고향의 새로운 변화와 좋은 사람과 좋은 일을 많이 써내려는 욕망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강습반은 석달이 한기였다. 나는 휴식일에 당직을 서기도 하고 다른 일도 하는 것으로 출근시간을 메워가며 강습반에 참가했다.
그해 5월초에 나의 첫 글이《연변일보》에 실렸다. 처음으로 내 이름이 박힌 신문을 받아쥔 나는 눈굽이 젖어났다. 이 어찌 한편의 글이라고만 하겠는가? 그것은 한 장애인 녀성이 심신의 검은 그림자와의 박투였고 삶에 대한 의욕이였다.
낮이면 출근하고 저녁이면 나는 자주 취재에 나섰다. 고향에는 정겨운 이야기가 많았고 인정미가 찰찰 넘쳐 쓸 소재가 샘물 솟듯 솟아나와 나는 도무지 앉아있지 못했다.
시골마을은 가로등이 없어 나는 손전등을 켜고 나섰다. 그래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가 있었다. 어느 한번은 잘못 넘어져 코등에 상처가 나기도 했다.
“에그에그 어서 그만둬. 이런 일은 네가 하기 힘들구나. 괜히 큰 일이 날라구.” 어머니가 걱정스레 말했지만 그만한 일에 물러설 내가 아니였다. 무슨 일이든 대가를 필요로 하는데 하물며 글 쓰는 일은 수고가 더 말할 수 없이 많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도 부지런히 글을 써보냈더니 여러 신문사에서 믿어주고 인정해주었다. 1991년 음력설을 며칠 앞두고 흑룡강신문사에서 원고 부탁이 왔다. 음력설 전에 나갈 원고이니 속히 보내달라는 것이였다. 그날 나는 퇴근하자 바람으로 금광촌에 가서 취재했다. 취재가 끝난 그날 저녁으로 원고를 쓰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글이 마음에 들어서야 나는 자리에 누웠다. 그때는 이미 저녁 열두시였다. 이튿날 나는 우체국에 가서 속달우편으로 보냈다. 그 글은 마침내 음력설 신문에 실렸다. 나는 개선장군마냥 마음이 뿌듯해났다.
그렇게 한편 또 한편의 글이 신문에 실릴 때마다 그 즐거움은 무엇으로 형용할 수 없었다. 쓰고 보내고를 반복하는 무수한 나날들이 흘러갔다. 그 흐름 속에서 나는 그 어떤 역경도 이겨내는 강자의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악장에 인생의 구성진 노래를 엮어가는 자신을 알게 되였고 날로 성숙되면서 넓어지는 자기마당 한복판에 굳어지는 하나의 투명한 신념과 함께 좁은 가슴을 불태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듬해부터 나는《연변일보》,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흑룡강신문》등 매체에서 수차례 우수통신원으로 선정되였다.
수많은 신문원고외에도 소설, 수필, 동화 등 많은 문학작품도 발표했는데 내가 쓴 현대이야기집《밤중에 찾아온 남자》, 동시집 《꿈나무 사랑나무》, 자서전《비운의 마라토너》가 출간되였다. 2003년에 연변작가협회에 가입하고 2006년부터 2016년까지 안도현정협 위원으로 활약했으며 2012년에는 ‘안도현 10대 도덕모범’이란 영예를 안게 되였다. 이 밖에도 각종 글쓰기응모에서 여러차례 수상하게 되였다. 매번 절뚝대는 걸음으로 수상대에 오를 때면 나는 눈굽이 젖어들군 했다. 그 시각에 눈에서 반짝이는 눈물은 기쁨과 행복의 상징이였고 고향에 대한 감사함이기도 했다. 나는 글쓰기에서 생의 아름다움을 알고 어엿한 자신을 찾게 되였으며 눈물 역시 높은 차원에서의 장엄한 향수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짙은 흑갈색의 그늘 때문에 직사광선을 받는 부분이 더욱 빛나듯이 어려웠던 순간들을 잘 극복하고 삶 전체와 조화를 이루면서 열심히 분발해온 나에게는 승리의 월계관이 씌워져있다. 이 월계관은 바로 고향이 씌워준 것이다. 어머니가 날 낳았지만 고향은 나를 어엿한 작가로 키워주었다. 그래서 고향에 머리숙여 인사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