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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2-08-02 14:02:15 조회

(전호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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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연평(1903-1938)

길림성 연길현 사람이다. 1932년 6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동북항일련군 제4군 군장을 력임했다. 1936년 2월 부대를 거느리고 보청, 부금 지역에서 새로운 항일유격구과 유격근거지를 개척했다. 1938년 5월, 부대를 령솔해 서부원정을 시작, 적들의 공격을 받아 흩어진 후 왕광우 등 10여명의 전사들과 함께 계속해 오상, 주하 일대에서 활동했다. 1938년 11월 20일, 오상현 일면파에서 희생됐다. 2014년 민정부로부터 제1패 300명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됐다.
 

1931년 ‘9.18’사변 후 리연평은 안해와 아이와 작별하고 흑룡강성 녕안현에 가 둘째 형님 리연록이 있는 ‘길림중국국민구국단’에 가입, 중국공산당이 직접 령도하는 보충퇀에 배치받았다. 얼마 후, 보충퇀부 부관(补充团部副官), 작전참모로 임명됐다. 1932년 2월, 그는 돈화현성을 공략하는 전역에 참가했다.
1932년 6월, 당조직은 리연평을 공산당원으로 받아들였다. 1933년 1월, 동북항일구국유격군이 설립된 후 리연평은 수녕유격지대 대대장으로 임명됐다. 그해 겨울, 리연평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주의대학에 가서 학습했다. 1935년 겨울, 학습을 마친 그는 당조직의 배치에 따라 동북항일전장으로 돌아왔다. 1936년초, 리연평이 동북항일련군 제4군 군장을 맡게 되였다. 그해 여름, 그는 부대를 거느리고 부금현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보청지역 괴뢰경찰서를 습격하고 리금위자, 하도구와 삼도강 일대에서 항일유격구를 개척했다. 1936년 겨울, 리연평은 4군을 령솔해 위만보청산파경찰서, 량수가자경찰서를 제거하고 쌍류하, 취보산, 양영위자 등 지역의 괴뢰경찰분주소를 습격했으며 보청중진 칠리포거점을 제거했다. 항일련군 제4군은 리연평의 령도하에 규모적으로 발전해 1937년 1월, 부대는 4개 사, 10개 퇀, 2000여명으로 발전했다.
1937년 ‘7.7사변’ 후, 일본군은 동북항일무장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리연평은 8월말, 부대를 거느리고 보청현 량수천자를 공략, 20여명 적들을 섬멸하고 3자루 경기관총과 100자루 보총을 로획했다. 9월 29일, 중공길동성위는 의란현 사도하자에서 성당위 상무위원 사업회의를 소집, 회의는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준비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리연평이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선거됐다.
1938년 5월 1일, 항일련군 제4군, 제5군의 지도자들이 보청에서 회의를 소집, 대적투쟁 책략을 연구했다. 중공길동성위의 서부원정 방침에 따라 7월 2일, 리연평과 부군장 왕광우는 4군 1사, 2사와 5군과 함께 의동에서 출발했다. 7월 12일 날이 밝아올 무렵 서부원정부대는 리연평의 지휘하에 위하현 루산진내 괴뢰군을 습격했다. 아군은 루산진을 승리적으로 점령했으며 40여명 적군을 포로하고 식량과 군용물자들을 로획했다. 4군과 5군의 한개 부대는 리연평의 령솔하에 오상으로 향했다. 9월 하순, 4군이 적들의 포위를 당했고 전투중에 대오가 흩어졌으며 60여명 아군이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11월 20일, 리연평과 7, 8명 전사들이 오상현 일면파 착초정자에서 희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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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관(1915-1938)

조선족, 연길현 룡암동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31년 공청단에 가입하고 1933년 연길현 의란구유격대에 참가했다. 1934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설립되면서 제1퇀 3련 전사로 되였다. 193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8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2군 4사 경위련 지도원으로 임명됐다. 1939년 3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경위려 경위 3퇀 퇀장으로 임명된 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과 함께 대사하전투, 류수하전투에 참가했다. 8월, 안도현 대사하에서 적들의 포위를 뚫다가 체포되고 끝내는 적들에게 살해됐다. 2020년 퇴역군인사무부로부터 제3패 185명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됐다.

 
1930년 8월, 중공연길구위가 건립되고 최철관은 소선대에 가입했다. 1931년 가을, 최철관은 ‘추수투쟁’혁명에 적극 참가, 그해 겨울 공청단에 가입했다. 1932년 4월 중순,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에서 항일무장을 건립하는 사업에 참가했다. 9월 16일, 그는 명령을 받고 적위대원과 함께 지주인 서림의 집에 가서 무기를 로획했다. 그해 겨울, 최철관은 연길현반일유격대에 참가, 제2중대에 편입되였다. 1934년 봄, 연길현반일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으로 개편되고 그는 1퇀 3련 반장으로 되였다. 1935년 1월초, 1퇀은 부대의 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로투구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1월 6일, 최철관은 10여명 전사를 이끌고 ‘삯군’으로 위장해 로투구에 잠입, 대부대의 진공을 협조했다. 1퇀은 로투구를 점령해 4400여원의 현금과 8300원에 달하는 물품을 로획했다. 1936년 최철관이 소속된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1사(후에 제4사로 고침)는 안도에서 출발해 돈화, 교하, 화전을 거쳐 무송, 림강, 장백 등 현 경내에서 활동하고 장백산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했다. 얼마 후, 최철관은 패장으로 임명되였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7년 4월 상순, 4사는 무송에서 출발해 안도, 돈화로 진군했다. 1939년 1월, 4사는 화전현에서 양정우가 령솔하는 제1로군 경위려, 소년철혈대와 합류했다. 최철관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4사 경위련 지도원으로 승급했다. 3월 상순, 양정우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화전현 목기하목장을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목기하전역이 결속된 후 그는 항일련군 제1로군 경위려 제3퇀 퇀장으로 임명되였다.
1939년 8월 28일, 최철관이 9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안도현 대사하에서 식량을 마련하다가 150여명 일본괴뢰군에게 포위되였다. 최철관은 2명의 전사들을 령솔해 부대가 철거하도록 적극 엄호, 부대는 안전하게 전이했다. 엄호 과정에 2명의 전사가 장렬히 희생되였고 그도 부상을 입은 후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적들의 혹독한 고문에 그는 굴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적들에 의해 생매장됐다. 최철관은 장렬히 희생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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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국충(1904-1939)
1904년, 훈춘현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했다. 1933년 3월, 훈춘현 마적달에서 항일의 기치를 들고 훈춘현반일유격대에 가입한 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4년 이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4퇀 참모장, 제4퇀 부퇀장,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2사 제4퇀 퇀장, 제2군 제5사 부사장 겸 제4퇀 퇀장,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 부지휘 등 직위를 력임했다. 1939년 8월 24일, 안도현 대사하전역에서 희생됐다. 2015년 민정부로부터 제2패 600명 저명한 항일영렬 및 항일군체 명록에 수록됐다.

 
‘9.18’사변 후, 왕옥진은 항일구국의 기치를 들고 구국군을 조직했다. 후국충은 구국군 ‘요퇀(姚团)’ 3련 반장으로 되였다. 1932년, 구국군이 패배하고 ‘요퇀’은 일본군에게 항복했다. 후국충은 24명 사병들을 발동, 조직해 반일산림대 기치를 들고 ‘사계호(四季好)’라는 이름으로 훈춘현 이도구, 삼도구, 금장 일대에서 활동했다.
1933년 11월, 후국충은 부대를 이끌고 훈춘현항일유격대에 가입했다. 얼마 후,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4년 봄, 연길, 훈춘, 왕청, 화룡 4개 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편성되고 후국충이 3퇀 1련 련장으로 임명됐다. 후국충은 일부 대오를 거느리고 원활한 전략으로 며칠 만에 적들의 3개 ‘집단부락’을 점령, 3개 괴뢰자위단을 섬멸했다.
1935년 3월, 후국충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4퇀 참모장, 5월에는 4퇀 퇀장으로 임명됐다. 동만항일부대와 길동항일부대와의 련계를 취하고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기 위해 2군은 길동지역을 향한 원정을 시작했다. 후국충이 거느리는 부대는 제2로군 원정군에 참가했다. 1935년 여름, 부대가 로흑산까지 행군했을 때 괴뢰정안군의 저격을 받았다. 후국충은 4퇀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지형우세를 리용해 한개 련의 적들을 소멸하고 군용물자를 로획했다. 그 후 부대는 5군과 승리적으로 합류했다.
1935년 12월, 중공길동특위와 중공동만특위는 제2군, 제5군 림시련합지휘부를 설립하기로 결정, 2개 군이 동, 서 두갈래로 나눠 활동하고 주보중을 총지휘로 임명했다. 후국충은 동선 부지휘를 맡아 동녕, 의란 등 지역에서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했다.
1936년 6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이 설립되고 후국충을 제2군 제5사 4퇀 퇀장으로 임명했다. 9월 10일, 1군, 2군과 5군 련합부대는 목단강 지하당조직으로부터 일본군 특별화물차가 목단강 동역에서 출발해 수분하 국경선으로 간다는 정보를 받았다. 후국충과 5군 1사 정치부 주임 장중화는 역전 부근에 매복해 렬차를 습격하고 일본군의 한개 공병련을 섬멸했다. 이번 전역은 적들의 국방공사를 구축하려는 계획을 파괴했다.
1937년 5월, 후국충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5사 부사장 겸 제4퇀 퇀장으로 임명됐다. 1938년 여름, 항일련군은 서부원정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7월초, 2군 5사는 사장 진한장, 부사장 후국충의 령솔하에 서부원정을 시작했다. 그들은 녕안현 경박호수전소를 지키던 일본수비대를 습격, 적들을 전부 섬멸하고 일본군의 공사사무소를 불질렀으며 붙잡혀 일하던 로동자들을 석방함으로써 일본침략자들의 심혈을 기울인 ‘경박호 폭포수전소 건축계획’을 크게 타격했다. 그들은 또 도가철도와 녕안부터 돈화에 이르는 도로를 파괴함으로써 적들의 교통운수를 파괴했다. 8월말 후국충과 진한장은 부대를 거느리고 동경성에서 600여명 일본군의 횡도하자에 대한 진공을 분쇄, 200여명의 적을 사살했다.
1939년 7월, 안도현 량강 한요구에서 제2군 제4사, 제5사는 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으로 합병되고 진한장이 제3방면군 총지휘로, 후국충이 부총지휘로 임명됐다. 8월 23일, 제3방면군은 제1로군 부총사령 위증민과 진한장의 령솔하에 대사하(오늘의 안도현 영경향)를 진공했다. 전투가 결속될 무렵, 후국충은 부대가 파리구 방향으로 철수하도록 엄호하다가 총에 맞아 장렬히 희생되였다. 당시 나이는 35세였다.
 
36
오중흡(1910-1939)
조선족,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했다. 1914년 2월, 가족을 따라 길림성 왕청현 석현구 남양촌으로 이주했다. 193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9년 1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제7퇀 퇀장으로 임명됐다. 1939년 12월 17일, 항일련군을 령솔해 돈화 륙과송일본괴뢰경찰서를 습격했다. 이번 전투에서 불행하게도 총에 맞아 희생됐다.

 
오중흡은 현지 혁명자들의 영향을 받아 1930년에 농민협회에 가입하고 1931년 ‘9.18’사변 후 농민협회의 주요책임자로 되였다. 1933년 5월, 당조직은 오중흡과 그의 가족을 당시 중공동만특위 소재지인 소왕청근거지로 전이시켰다. 이곳에서 그는 왕청현반일유격대에 가입했다. 얼마 후 오중흡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 기간 그의 안해와 아이 그리고 자매들이 전부 일본침략자에게 살해당했다. 1934년 3월, 왕청현반일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3퇀으로 개편, 오중흡이 청년간사를 맡았고 부대와 군중 속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선전사업을 적극 전개했다. 1936년, 일본제국주의는 동북항일력량을 철저히 소멸하기 위해 ‘치안숙정 3년 계획’을 제정하고 동북항일련군 제2군의 주요활동지역인 동만지역에 대해 ‘토벌’을 발동했다. 동북항일련군 제2군의 주력부대를 남만으로 전이, 남만지역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련군 제1군과 합류해 장백산항일근거지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오중흡이 제2군 제3사(그해 7월 제6사로 개명)에서 중대장을 맡고 형제부대와 함께 1936년 4월부터 8월까지 선후로 몽강(오늘의 정우), 화전, 무송, 림강, 장백 등 현에서 수십차례 크고 작은 전역을 펼침으로써 장백산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했다.
1939년 1월, 오중흡이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제7퇀 퇀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제2방면군과 함께 장백현 칠도구로 갔다. 얼마 후 제2방면군이 일본괴뢰군에게 포위됐다. 제2방면군 지휘부는 부대를 3갈래로 나누어 3개 방면으로 포위를 뚫기로 결정, 주력부대가 칠도하 숙영지에서 철수하고 오중흡은 7퇀을 거느리고 적들을 유인해 섬멸했다. 10월, 제2방면군은 돈화 륙과송 일대에서 활동하기로 했다. 전이 도중에 그들은 적들과 수차례 전투를 펼쳤고 마침내 12월 16일, 륙과송 남구에 도착했다. 12월 17일 심야, 오중흡이 제7퇀을 거느리고 어둠을 타 70여명이 주둔해있는 괴뢰삼림경찰대를 습격, 부대가 마지막 철조망을 지날 때 적들에게 발각되였고 적들의 미친 듯한 공격을 받았다. 오중흡은 불행하게도 총에 맞아 희생됐다.    

(다음기 계속)
 
장설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
작가:장홍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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