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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3-03-12 09:43:22 조회

(전호 이음)
 
50 김성범(1924-1947)
조선족, 조선 평안북도에서 출생했다. 1945년 8월, 팔로군 기동군구 유격대에 가입했으며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조선의용군 제5지대에 편입되여 군대를 따라 연변에 왔다. 1946년초, 길동경비 1려 2퇀 2영 7련 련장을 맡고 토비숙청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워 길동에 널리 이름을 날렸다. 그해 여름, 7련은 하얼바령 방어공사를 수선할 때 모범련 칭호를 수여받았다. 같은 해 9월, 김성범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7년 11월, 7련은 길림해방전투에 참가했는데 김성범은 의외의 사고로 중상을 입고 불행히 희생되였다. 김성범이 희생된 후 7련은 김성범의 영용하고 완강한 전투정신을 계승하여 해방전쟁 기간에 선후로 30여차례 전투에 참가하고 2차례의 집단대공을 세웠으며 ‘영용하고 완강한 김성범련’ 등 수많은 영예칭호를 받았다. 1949년, 중국인민해방군 156사는 남창에서 군영대회를 열고 김성범을 렬사, 인민영웅으로 추인했으며 7련은 ‘김성범모범련’의 칭호를 받았다.
 
1944년 10월, 김성범은 하북성 당산지역의 로대농장에서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당시, 팔로군 기동군구당위에서는 태항산 조선의용군의 지하공작자인 리대성을 파견하여 로대농장에 잠입하게 했다. 김성범은 리대성의 지도를 받고 재빨리 혁명각오를 높여 항일구국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45년 8월초, 로대농장의 70여명 청년들은 결연히 팔로군 기동군구 조선인 유격대에 가입했다.
1945년 8월말, 김성범이 소속된 부대는 주덕 총사령이 내린 제6호 명령에 따라 동북으로 진군해 얼마 후 심양에 도착했다. 1945년말, 그는 조선의용군 교도대에서 단기훈련을 거친 후 연변경비사령부 명월구 경비영에 배치되였다. 1946년 2월, 부대는 선후로 삼도만, 묘령, 아이미달(阿尔米达), 천교령 등 지역의 토비를 숙청한 후 천교령에서 재편성을 진행했다. 김성범은 길동군구 경비 1려 2퇀 2영 7련의 련장으로 임명됐다. 김성범이 이끄는 7련은 선후로 라자구, 태평령, 로흑산, 돈화, 액목 등 곳에서 여러 차례의 토비숙청 전투에 참가했으며 맹렬하게 추격하고 공격하는 작전풍격으로 위세를 떨치며 길동전역에서 이름을 날렸다.
1946년 여름, 국민당 군대는 동북해방구를 대거 진공하여 사평, 장춘, 길림을 점령한 후 이어서 동쪽으로 신참, 랍법, 로야령을 향해 진군했다. 준엄한 형세하에 길동군구 사령부, 길림성당위와 길림성 정부는 연길로 옮겼으며 동북민주련군 주력부대가 신참과 로야령 전선에서 적들의 진군을 가로막기로 했다. 한편, 지방부대와 인민군중들은 함께 하얼바령과 신개령의 접경지역에 방어공사를 수축하고 힘을 합쳐 길동을 보위했다. 김성범은 7련을 이끌고 우수하게 임무를 완성했으며 1946년 9월, 김성범은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7년 3월 7일, 7련은 상급의 명령을 받고 6련과 함께 길림 교외의 사간방촌에 주둔해있는 국민당 군대의 한개 가강영을 공격해 격렬한 전투를 거쳐 적 80여명을 사살하고 20여명의 포로를 포획했으며 돼지고기와 밀가루를 실은 마차 27대를 로획했다.
1947년 11월 7일, 김성범은 의외의 사고로 머리에 중상을 입고 훈춘 후방병원에 호송되였으나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3세였다. 이후 전국 해방전쟁에서 7련은 두차례나 사퇀당위로부터 ‘김성범모범련’의 칭호를 받았다. 1949년, 남창군구에서는 영웅모범표창대회를 열고 김성범을 혁명렬사, 인민영웅으로 추인했다.
 
51 한락연(1898-1947)
조선족, 길림성 연길현 룡정촌에서 태여났다. 젊은 시절 그는 룡정 ‘3.13’ 반일시위운동에 참가했으며 1923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4년, 중공중앙의 파견을 받고 봉천에서 당사업에 종사했다. 1927년, 중공만주림시성위가 설립되고 당조직에서는 그를 치치할시로 파견해 혁명활동에 종사하게 했다. 1929년, 한락연은 중공중앙의 부름을 받고 상해에 돌아와 사업했다. 1931년, 한락연은 빠리 루브르예술학원에 입학해 공부했으며 이와 동시에 제3국제의 위탁을 받고 혁명활동을 진행했다. 1937년, 한락연은 귀국해 무한에서 동북항일구망총회에 참가해 선전사업을 책임졌다. 1939년, 국민당 상급 인사들에 대한 통일전선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한락연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전선 당정위원회에서 사업했다. 그는 제7작전구 사령부 소장지도원을 맡고 산서, 섬서 등의 국공 량군의 련락사업을 책임졌다. 이후 한락연은 감숙 주천에서 국민당 요원 도치악, 조수산 등의 봉기를 성사시켰다. 1947년 7월, 한락연은 비행기를 타고 란주로 가는 도중 추락사고로 불행히 사망했다.
 
한락연은 7살이 되던 해 마을의 학당에서 한어를 배웠다. 1919년, ‘3.13’대규모 반일시위를 진행, 한락연은 시위대오의 앞장에 섰다. 그해 봄, 그는 쏘련으로 가서 혁명활동에 참가하고 회화를 학습했다. 1920년, 한락연은 일부 조선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상해로 돌아왔으며 1923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얼마 안돼 사업의 수요로 또 국민당에 가입했다.
1924년초, 중공중앙 조직부 부장 임필시의 파견을 받고 한락연은 봉천에서 당조직 건립 사업에 종사했다. 1925년 7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할빈에서 그는 공산당원 초도남, 조상지 등과 함께 청년독서회, 평민야학 등을 조직했으며 청년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혁명선전 사업을 펼쳤다. 1927년 10월, 중공만주림시성위가 설립되고 한락연은 치치할시에 파견되여 혁명활동에 종사하고 당조직을 건립했다. 
1929년, 한락연은 중공중앙의 부름을 받고 상해로 돌아와 지하당조직의 재무사업을 책임졌다. 그는 신분이 폭로되자 당조직의 동의를 거쳐 1929년 가을, 유럽으로 떠났다.
1931년, 빠리에 도착한 한락연은 루브르예술학원에서 고학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제3국제의 위탁을 받고 시종 공산당원의 신분으로 혁명활동을 견지했다. 얼마 후에는 혁명수요로 자전거 한대를 사서 유럽을 일주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편리를 리용해 혁명활동에 종사했다. 그는 선후로 화란에서 4차례의 개인전시회를 열었고 각계의 호평을 얻었다. 1937년 ‘7.7사변’ 이후 그는 즉시 프랑스 빠리로 돌아와《빠리석간》의 촬영기자로 사업했으며 반파쑈투쟁 국제선전사업에 뛰여들었다.
1937년 가을, 한락연은 양호성 장군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무한에서 동북항일구망총회에 참가했으며 선전과 련락 사업을 책임졌다. 1939년 4월, 국민당 고위층인사들에 대한 통전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한락연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전선 당정위원회에서 사업했다. 그는 제7작전구 사령부 소장지도원을 맡고 산서, 섬서 등의 국공 량군의 련락사업을 책임졌다. 
1944년 늦가을, 한락연은 온 가족을 이끌고 감숙성 란주시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한편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주천에서 하서경비구 사령 도치악 장군에게 중국혁명의 전도에 대해 분석하면서 중국공산당의 방침과 정책에 대해 소개했다. 이는 후에 도치악 장군이 장개석 정부와 결렬하고 인민의 편에 서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945년 10월, 찬란한 문화예술유산을 발굴, 정리하기 위해 그는 돈황막고굴 천불동에 가서 벽화를 모사했다. 1946년 봄, 한락연은 신강으로 떠났으며 선후로 투루판, 승금대에 가서 당나라 시기의 묘우를 고찰했다. 그해 9월, 그는 란주에서 19번째의 개인화전을 열게 되였으며 이는 서북지역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47년 7월 30일, 한락연이 탑승한 디화(우룸치)-란주행 ‘257호’ 군용비행기는 가욕관외 상공에서 악천후를 만나 기련산에 추락했으며 한락연은 불행히 사망했다. 새 중국이 창건된 후 한락연은 혁명렬사로 추인되였다.
 
52 양보산(1919-1951)
길림성 돈화현 사람. 1945년 12월, 동북인민자치군에 가입하고 반장, 패장, 련장을 력임했다. 그는 료심전역, 평진전역, 중경해방전역, 상서지역 토비숙청전투에 참가하면서 대공을 4차례 세웠고 우리 군의 우수한 기층군사지휘원으로 성장했다. 1948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51년, 항미원조에 참가했다. 천덕산진지를 고수하는 전투에서 그는 전체 련을 지휘하여 적과 8시간의 격전을 벌였으며 적들의 돌격을 7차례 물리치고 300여명의 적을 사살했다. 전체 련의 대부분이 사상되였고 탄약까지 떨어진 정황에서 그는 홀로 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중국인민지원군 총부에서는 양보산이 이끈 5련에 특등공 1차를 수여하고 ‘천덕산에서 위세를 떨친 영웅련’ 칭호를 수여했으며 련장 양보산 역시 특등공 1차를 수여하고 ‘1급 전투영웅’의 칭호를 수여했다.
 
1919년, 돈화현 대석두진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양보산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세 녀동생도 질병으로 불행하게 요절하여 장기적인 류량생활을 이어갔다. 1945년 12월, 양보산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인민군대에 가입했다. 양보산은 용감하게 싸웠으며 담력과 지혜를 모두 겸비한 우수한 기층군사지휘원으로 성장했다. 
1947년 10월, 양보산은 부대를 따라 덕혜현을 공격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양보산이 이끄는 7반은 돌격련의 돌격반으로서 주력부대의 전진을 위해 장애물을 청산했으며 덕혜현 해방에 토대를 마련했다. 덕혜현을 해방하는 전투가 끝나고 전투평가에서 양보산은 대공 1차를 수여받았다.
1948년초, 신개원전투가 끝난 후 7반은 ‘양보산영웅반’ 칭호를 수여받고 양보산은 대공 1차를 수여받았으며 부패장으로 승급했다. 1948년 가을부터 1949년 1월까지 양보산은 료심전역과 평진전역에 련속 참가했다. 이후 부대는 승승장구하며 남방까지 쳐들어갔다. 
1949년 11월, 열래장전투에서 양보산이 소속된 5련은 도합 2000명의 적들을 생포했다. 양보산은 재차 대공을 기록했다.
1950년 양력설이 지난 후 부대는 배를 타고 동쪽으로 상서에 가서 토비를 숙청하는 임무를 집행하게 되였다. 양보산이 소속된 제10종대는 수개월 동안의 간고한 전투를 거쳐 토비들을 철저히 소멸하고 새로운 인민민주정권을 보위했으며 인민의 생명과 재산 안전을 지켜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내전이 폭발하고 1951년 3월 2일, 양보산이 소속한 제47군은 지원군의 행렬에 가입하여 장사에서 북상하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1951년 9월 21일, 양보산은 부대를 이끌고 천덕산 진지의 방어임무를 인계받았다. 양보산은 전사들을 고무하여 전투에서 영웅련의 기적을 창조해야 하며 ‘영웅이 되지 못하면 산을 내려가지 않는다’는 전투구호를 제기했다. 그렇게 5련은 적들과 싸울 만단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9월말, 미군은 가을철 공세를 발동했다. 10월 1일, 미군은 천덕산을 향해 총공격을 발동했다. 양보산은 부대를 이끌고 천덕산진지의 최전방을 고수하고 있었다. 10월 1일 하루 동안만 해도 5련은 련속적으로 7차례나 적의 진군을 물리쳤으며 300여명의 적을 사살했다. 10월 3일, 전투는 더욱 치렬해졌다. 적들이 측면에서부터 천덕산진지를 향해 진공하자 양보산은 20여명의 부상을 입은 전우들을 조직하여 적들과 끝까지 싸울 것을 결심했다. 이때 탄약은 다 떨어졌고 얼마 안되는 수류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양보산은 중요 문건을 페기하고 수류탄을 움켜쥔 채 은페된 위치에서 적들 속으로 뛰여들어가  희생했다. 이후 증원부대가 도착해 적들을 물리쳤다.
중국인민지원군 총부에서는 5련에 특등공 1차를 수여하고 ‘천덕산에서 위세를 떨친 영웅련’이라는 칭호를 수여했으며 련장 양보산에게 특등공 1차를 수여하고 ‘1급 전투영웅’의 칭호를 수여했다. 1952년 10월 5일, 양보산이 소속된 제47군은 양보산에게 자유독립 2급 훈장을 추서했다. 2020년 10월, 중공중앙 선전부 등 부문에서 거행한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작전 70주년 기념 주제전람회에 양보산 사적도 전람되였다.    
 
 
 
(다음기 계속)
박진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
 
작가:장홍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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