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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3-03-12 10:47:32 조회

(전호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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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상청(1904—1960)
본명은 리연호이며 길림성 연길현에서 태여났다.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하남성 초작중심현당위 서기, 하북성 북평시당위 서기, 하북성당위 군사위원회 서기, 중공진찰기중앙분국 선전위원회 서기, 화북련합대학 교육학원 원장 겸 당조서기 등을 력임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동북에 돌아와 중공중앙 동북국 선전부 비서장 겸 동북일보사 사장, 합강성당위 상무위원, 선전부장과 도시공업부장, 할빈시당위 서기를 력임했으며 새 중국 창건 이후에는 할빈시당위 서기, 송강성당위 서기 겸 할빈시당위 서기, 송강군구 정치위원을 력임했다. 1960년 8월, 교통사고로 불행하게 사망했다.
 
1915년, 리상청은 연길현제2소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17년, 연길도립사범학교에 전학했으며 1921년, 졸업한 후 화룡현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6년, 시험에 합격해 길림성교육청 련습원에 채용된 후 교육청 과학, 독학으로 승급했다. 이 시기 그는 신사조의 영향을 받았으며 사회주의에 관련된 일부 서적들을 읽게 되였다. 그는 중국을 침략한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동정했다. 1931년 가을, 화룡현제2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적극적으로 항일선전활동에 참가했으며 1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5월, 리상청은 당조직의 파견으로 북평에서 중공서성‘반제국주의대동맹’ 서기를 담임했다. 그는 경상적으로 소상인으로 분장하고 전차로동자들 속에서 혁명선전 사업을 펼쳤다. 1933년, 당조직에서는 그를 락양으로 파견해 롱해철도로동자운동을 전개하게 했다. 1934년 4월, 그는 중공하남성 초작시특별위원회 서기로 부임했다. 같은 해 가을, 반역자의 밀고로 인해 하남성 지하당조직은 엄중하게 파괴되였다.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천진에 도착한 그는 신분을 숨기고 당고에서 부륜소학교 교원으로 있으면서 혁명활동에 종사했다. 1935년 9월, 하북성당위 특파원 겸 북평시당위 서기를 맡고 북평의 당퇀사업을 령도했다. 화북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북평시당위는 즉시적으로 북평의 애국학생들을 령도, 조직하여 중외를 진감하는 ‘12.9’ 학생운동을 일으켰다. 같은 해 12월 하순, 북평시당위는 북평‘학생련합’에서 평진남하선전단을 조직하여 하북 농촌에서 항일선전을 진행할 것을 결정했다. 이와 동시에 리상청의 제안에 따라 중국청년구망선봉단과 민족해방선봉대를 중화민족해방선봉대로 합병했다. 1936년 겨울, 중공북방국에서는 리상청을 하북성당위 군사위원회 서기로 부임시켰다. 1937년 ‘7.7사변’ 이후 그는 북방국의 파견으로 북평시당위 서기 겸 하북성당위 북평시 주재대표를 맡았다. 1939년, 중공진찰기중앙분국 선전위원회 서기를 맡고 진찰기일보사 사장을 겸임했다. 1942년 겨울, 화북련합대학 교육학원 원장 겸 당위 서기를 맡았다.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리상청은 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출동했으며 같은 해 10월, 중공동북국 기관보 동북일보사 사장 겸 중공중앙 동북국 선전부 비서장을 맡았다. 1948년 겨울, 합강성당위 선전부장 겸 도시공업부장을 맡고 1949년 5월, 할빈시당위 서기를 맡았으며 1952년 6월, 송강성당위 서기와 할빈시당위 서기를 겸하는 동시에 중공송강성정협 주석을 겸임했다. 1960년 8월 5일, 교통사고로 불행하게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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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윤성(1910—1965)
마영이라고도 하며 흑룡강성 녕안현에서 태여났다.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3년초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네개 현 유격대 수분판사처 주임을 맡았다. 11월, 왕청현당위 선전부장을 맡고 1935년 1월, 훈춘현당위 서기를 맡았다. 1935년 3월 이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4퇀 정치위원,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2사 정치위원, 남만성당위 위원,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5사 정치위원을 맡았다. 새 중국 창건 이후 길림성 서란광무국 부국장 등 직무를 맡았다.
1930년 10월, 왕윤성은 녕안사범학교 재학기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1년 ‘9.18사변’ 이후 중공녕안현성지부 서기를 맡았다. 1932년 봄, 녕안중심현당위의 파견으로 왕덕림이 이끄는 구국군에서 사업했다. 7월, 그는 주보중 등 공산당원들과 함께 비밀리에 당지부를 조직하고 공산당의 항일구국 주장을 선전하며 구국군내에서 당의 영향을 확대시켰다. 1933년초, 구국군이 실패한 후 중공동만특위의 파견으로 왕윤성은 연길, 화룡, 왕청, 훈춘 4개 현 유격대 수분판사처 주임을 맡고 주요하게 구국군의 남은 병력들을 련락하여 항일구국 투쟁을 끝까지 진행하도록 쟁취하고 고무했다. 1933년 11월, 왕윤성은 왕청현당위 선전부장으로 부임했다. 1934년 겨울, 훈춘현 당퇀조직은 엄중한 파괴를 당하고 왕청현 금창지역으로 전이했다. 1935년 1월, 중공동만특위에서는 왕윤성을 훈춘현당위 서기로 임명했다. 2월, 그는 금창에서 훈춘현당퇀확대회의를 소집했는데 각 구당위를 철회하고 현당위에서 각 기층조직을 직접 령도할 것을 선포했다.
1935년 2월 하순, 중공동만특위와 공청단동만특위는 왕청현 대황위에서 제1차 련석확대회의를 소집하고 동만당퇀특위 령도기구를 재선거했다. 왕윤성은 중공동만특위 위원으로 선거되였다. 1935년 5월 30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정식으로 설립되고 산하에 4개 퇀을 설치했는데 왕윤성은 제4퇀 정치위원을 맡았다. 6월, 그는 2군 참모장 류한흥 등과 함께 제2군 3퇀, 4퇀을 이끌고 동녕, 녕안으로 진군했다.
1936년 2월 7일, 동만성당위(당시 정식으로 설립되지 않음) 서기 위증민은 녕안 5군 밀영에서 중공동만당조직 및 왕윤성에게 편지를 보내 왕윤성이 동만성당위 위원 겸 동부중심현당위 서기를 담임하도록 지목했다. 3월 상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재편성되고 왕윤성이 제2군 2사 정치위원을 맡았다. 7월, 항일련군 제1군, 제2군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으로 통합편성되고 제2군의 1사, 2사, 3사를 각기 4사, 5사, 6사로 개편했다. 왕윤성은 제5사의 정치위원을 맡았다. 제5사는 남만성당위와 길동성당위, 제1로군과 제3군, 제5군 및 국제와의 교통련락 등 임무를 책임졌다. 제5사는 왕윤성과 사장대리 진한장의 령도하에 제5군과 밀접히 협조해 녕안현 남호두 방신구 일대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목릉, 동녕까지 서쪽으로는 액목까지 광활한 지역에서 활약했다. 또한 수시로 소부대를 동만유격구에 파견해 투쟁을 전개했으며 적들에게 호된 타격을 안김으로써 동만 로구역의 광범한 인민군중들의 항일열정을 크게 고무했다.
1936년, 중공도남특위의 통일적인 배치에 따라 왕윤성은 제5사를 이끌고 유격전을 적극 전개했다. 그해 겨울, 왕윤성은 부대를 이끌고 녕안과 목릉 두 현의 접경지에 있는 대단금광을 습격해 적의 수비대 70여명을 소멸하고 그들의 무기 전부를 로획했다.
그해 년말, 왕윤성은 쏘련으로 가 공산국제대표단 주재 중국공산당에 사업을 보고하고 청시했으며 그 후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주의대학에 남아 학습했다. 1954년, 귀국한 후 1957년부터 선후하여 교하현광무국 광장, 서란광무국 부국장과 당위 부서기를 력임했다. 1965년 10월 10일, 왕윤성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58
제도(1921—1966)
하북성 숙녕현 사람이다. 1938년, 중국신민주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 1944년 11월, 명을 받고 관외 항일전선에서 새로운 구역을 개척하는 사업을 진행했는데 열하, 적봉 등 곳에 현무장사업대를 조직, 건설했다. 1945년 1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53년 2월, 리수현당위 서기를 맡고 1955년 2월, 국영 리수농장 당위 서기 겸 농장장을 맡았다. 1957년 9월 3일, 공주령 전원공서 부전담원으로 승임했다. 1963년 4월, 길림성농업청 부청장을 맡고 7월, 훈춘현당위 제1서기 겸 변방구 사령원을 맡았다. 훈춘에 있는 3년여의 시간 동안 제도는 현당위를 이끌고 바람을 막고 사막을 다스리는 사업을 전개했으며 백리평원에서 분투하면서 집체경제를 장대시키고 변경의 안정과 안전을 수호했다.
 
1963년 7월, 3년의 자연재해를 갓 이겨낸 훈춘인민들은 아직 기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또다시 풍사와 가뭄에 시달려야 했다. 워낙 가난했던 변경의 작은 현은 이 무렵 농업생산을 대부금에 의해, 백성들의 식량은 국가의 식량방출에 의해 해결하다 보니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어려움을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상급 당조직에서는 제도를 훈춘에 파견하여 훈춘현 제20대 현당위 제1서기 직무를 이어받게 했으며 변방구 사령원을 겸임하게 했다.
1963년은 제2차 5개년 계획이 실시되는 관건시기였는데 훈춘을 발전시키는 임무는 매우 막중했고 간고했다. 제도는 “훈춘의 토지는 무수한 선렬들의 피와 생명으로 바꾸어온 것입니다. 매개 촌의 렬사비는 의미없이 세워져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념비가 인민들을 고무격려하도록 해야 합니다. 선렬들은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우리 공산당 간부들이 이 정도의 곤난을 두려워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군중들을 이끌고 공, 농업 생산을 바로잡을 수 없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제도는 각 공사에 심입하여 집체경제 상황을 료해했으며 사람들과 함께 집체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각 공사에서는 적극적으로 팔을 걷고 농기계수리공장, 가공공장 등을 세우기 시작했다. 많은 공사, 대대에서는 농민들이 산에 올라 농부산업을 하는 것을 지지했으며 덕분에 농업, 림업, 목축업, 농부산업, 어업은 모두 전면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당시 하다문공사와 화평촌은 생산이 락후하고 민심이 집중되지 못했다. 이 정황을 료해한 제도는 화평촌에 가서 자리잡고 군중들과 함께 생활하고 로동하면서 문제점을 료해했다. 제도의 이와 같은 태도는 사원들을 감동시켰는데 생산대 간부들이 책임감을 갖고 일하기 시작하고 사원들의 적극성도 한층 제고되였으며 덕분에 생산은 아주 빨리 제고되여 마을의 면모가 크게 변화했다. 1년 동안, 소수의 산간지역에 있는 공사를 제외하고 평원지역의 공사들에서는 모두 농업의 대풍작을 거두었다.
훈춘은 삼국의 접경지대에 자리해 그 지리적 위치가 매우 특수하다. 제도는 시종 변경의 안전과 안정을 마음속에 두고 해마다 변경에 위치한 공사들을 몇번씩 방문하군 했다. 제도는 변경 촌툰에 공동방위 조치를 실시했는데 어떤 곳에서는 ‘5가구 공동방위’, 어떤 곳에서는 ‘10가구 공동방위’를 실시했다. 그는 변경선 부근에 살고 있는 농민들을 조직하여 공동방위대오에 가입하도록 하고 변경공동방위대의 전사들과 함께 순찰을 하고 보초를 서며 생산에 참가하는 한편 군사훈련에도 참가하게 함으로써 변경의 안정을 수호했다.
“제도 서기의 마음속에는 오직 군중 뿐입니다.” 이는 훈춘현 군중들의 제도에 대한 평가이다. 제도는 회의하러 가는외에 대부분의 시간을 촌툰에서 보냈다. 3년 동안 그는 훈춘의 모든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민족 군중들과 정을 쌓았다.
다년간의 과로로 인해 제도의 신체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사업에만 마음을 쏟으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했는데 고통을 참고 사업하면서 농촌에 내려가기가 일쑤였다. 1966년 10월, 길림성인민병원에 입원한 제도는 원발성 간암, 식도암 진단을 받았다. 제도 서기의 투병소식을 전해들은 춘화공사의 한 농민은 참깨기름이 암치료에 좋다는 얘기에 밤새 짜놓은 참깨기름을 현당위로 가져오기까지 했다. 량수공사의 한 농민은 사과배를 가져왔고 대황구촌의 농민은 자연산 열목어를 가져와 기어코 제서기한테 가져가 대접하라고 했다. 길림성인민병원에서 훈춘현당위의 단부서기는 훈춘의 광범한 농민들의 마음을 제도에게 전해주었다. 제도는 매우 감격해하며 농민들이 보내온 음식들을 일일이 맛을 보았다. “나의 병 때문에 오히려 군중들에게 페를 끼쳤군요.” 사흘 후, 제도는 세상을 떠났다.
제도의 유체는 화장한 후 훈춘으로 운송되였으며 그의 념원에 따라 현성 서북산의 소나무숲에 안장되였다. 생전에 그는 이곳에서 “여긴 참 좋은 곳이군요. 훈춘의 주변 평원들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으니깐 말이예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1만명이 넘는 기관간부와 종업원, 여러 민족 군중들이 추도식에 참가했는데 대다수 군중들은 소식을 듣고 자원적으로 달려온 것이였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취
작가: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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