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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3-04-10 15:58:45 조회

(전호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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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곤일(1900—1969)
료녕성 창도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04년 겨울, 동곤일 일가는 길림성 화룡현 달라자촌으로 이주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4년 7월, 중공당고당지부 서기를 맡고 당의 지하공작을 전개했다.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동곤일은 연변행정감찰전원공서의 전원이 되였고 1947년, 길동행정감찰전원공서 전원 겸 길림성금광국 국장을 맡았으며 그해 11월, 길림성민정청 부청장으로 부임했다. 1948년 11월, 동북국 상업부 합작지도처 부처장으로 부임했으며 1949년 11월, 동북합작총사 업무처 처장 겸 당지부 서기를 담임했다. 얼마 후 전국합작총사 동북구 판사처 부주임을 맡았으며 1954년 10월, 전국합작총사 감사회 총감찰을 맡았다. 1959년 3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3기 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21년, 동곤일은 연길도립지방자치강습소에서 학습했고 졸업 후에는 화룡현공립제7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후에 화룡현제4소학교에서 교장 겸 현교육회장을 맡았다. 1926년, 화룡현 교육회장 겸 독학을 맡았는데 이 기간 애국주의사상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친일반동교장을 해고했다. 1927년, 훈춘현으로 부임되여 독학을 맡으며 계속하여 반제반봉건 활동을 진행했는데 이로 인해 훈춘반동당국으로부터 쫓겨나 화룡으로 돌아와 교원을 맡았다.
1931년 ‘9.18’사변 이후, 동곤일은 북평으로 가서 중국대학에 입학했으며 이 기간 반제대동맹에 참가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그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락양 부륜소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이를 방패로 당의 지하공작에 참가했다. 1934년 9월, 중공천진시위의 령도하에 중공당고당지부가 건립되였으며 동곤일이 서기를 맡았다. 동곤일의 령도하에 당고당지부는 항일선전을 진행하는 한편 당조직을 발전, 장대시켰다. 1935년 7월 6일, 국민당 당국은 일본침략자와 치욕적인 〈하매협정(何梅协定)〉을 체결했다. 인민들을 호소하여 항일구국을 하기 위해 당고당지부에서는 당원과 진보청년, 학생들을 령도하여 비밀리에 전단지와 표어를 배포하고 중앙의 ‘8.1선언’을 선전하며 국민당 정부의 매국죄행을 폭로했다. 9월, 동곤일은 평수로강장부륜소학교의 교장으로 부임되여 당의 지하공작을 계속했다.
1936년 8월, 동곤일은 동방상무인서관에 편집으로 파견되여 편집사업에 종사하게 되였다. 또한 이 신분을 방패로 삼아 당의 지하공작을 진행했다. 1937년 9월초, 중공북평시위의 파견으로 동곤일은 산동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그는 제성림시특별지부 지도부 성원으로 있다가 후에 중공제성림시현위 부서기를 맡았다. 1938년 상반년, 통일전선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동곤일은 국민당 동북군 51군 677퇀에 파견되여 정치위원대리를 맡으면서 이 퇀에서 당의 지도사업을 책임졌다. 8월, 그는 무한 동북구망총회에 파견되여 사업했다. 10월, 서안동방총분회 당단서기로 부임했으며 12월, 중조산과 락양에 파견되여 중국공업합작협회에서 사업했다. 1941년 5월, 중조산유격대에 파견되여 사업했으며 1941년 1월, 태항산 합작대의 대장으로 파견되였다. 8월, 태항산공상관리국 합작과 과장 겸 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1943년, 진기로예변구정부 건설청 생산과 부과장을 맡았다.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동곤일은 부대를 따라 길림성 연변지역에서 사업했는데 연변행정감찰전원공서 전원을 담임했다. 1947년 2월, 길동행정감찰전원공서가 설립되자 동곤일은 전원을 맡고 길림성금광국 국장을 겸임했다. 이후 선후하여 길림성민정청 부청장, 동북국 상업부 합작지도처 부처장, 전국합작총사 동북구 판사처 부주임, 전국합작총사 감사회 총감찰을 맡았으며 1959년 3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3기 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69년 6월 9일, 동곤일은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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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도(1911—1969)
만족, 길림성 훈춘현 사람이다. 1935년, 한석도는 북경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중국공산당 ‘8.1 선언’ 및 항일주장의 영향을 받게 되였다. 그는 ‘12.9’학생운동에 참가했다가 옥고를 치르게 되였는데 후에 당조직으로부터 성공적으로 구원되였다. 1936년 6월, 서안에서 동북군 학생대에 가입했으며 1937년, 국민혁명군 129사에서 영부 정치교원을 맡았다. 1939년 4월, 진태항황하일보사에서 편집으로 일했다. 1942년 8월, 태항변구 교육과 과장을 맡았으며 1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5년 8월, 동북해방 후 훈춘현장 겸 중공훈춘현위 서기로 임명되였다. 한석도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훈춘현인민정부의 설립자이다.
1936년 6월, 한석도는 서안에 가서 동북군 학생대 제4련에 가입했다. 1937년, 국민혁명군 129사에서 영부 정치교원을 맡았다. 필치가 훌륭했던 그는 1939년 4월, 산서 태항출판사 황하일보사에서 편집으로 일하게 되였다. 이 기간 그는 글로써 제국주의 죄행을 폭로하고 여러 민족이 칼과 총을 들고 일떠나 함께 침략자를 물리칠 것을 고무했으며 항일군민의 투쟁사기를 고무했다. 1942년 8월, 태항변구 교육과 과장을 맡고 11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5년 11월, 중공중앙 동북국, 중공길림성사업위원회에서는 그를 연변 훈춘에 파견하여 사업하게 했다. 당시 훈춘 반동세력은 매우 창궐했다. 한석도는 중공길림성사업위원회와 중공연변지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우선 훈춘현치안유지회 및 각 지역분회를 취소했으며 훈춘현 림시정부를 철회했다. 11월 15일, 한석도는 훈춘현 원 공서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훈춘현을 접수관리한다고 선포했으며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훈춘현정부를 조직, 건립했다. 인민민주정권의 특징을 구현하기 위해 한석도의 지지하에 여러 민족, 각계의 대표들을 정무위원으로 하는 훈춘현정무위원회도 설립했으며 공동으로 정부의 방침과 계획을 협상, 실시하기로 했다.
같은 해 12월, 중공훈춘현위가 새롭게 건립되고 한석도가 현당위 서기를 맡았다. 당시 오래동안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를 받아왔던 훈춘은 경제, 문화가 전례없이 락후했으며 군중들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모두 부족하고 생활이 아주 궁핍했다.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면을 안정시키기 위해 한석도는 수시로 위험을 무릅쓰고 공장, 점포, 백성들의 집에 가서 정황을 료해했으며 조사를 펼쳤다. 그는 현지의 영향력이 있는 상인들을 동원하여 훈춘현무역봉사유한회사를 건립했으며 백방으로 량식, 식염, 포목을 구입해 군중의 어려움을 해결했다.
새로운 홍색정권이 건립된 초기 사회의 정치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반혁명력량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온갖 수단을 다하여 반동무장을 끌어모았으며 새로운 혁명정권을 전복시키려고 애를 썼다.
위기를 마주한 한석도는 침착하게 현당위 동지들을 소집하여 적들과 대처할 책략을 연구하고 투쟁방안을 제정했다. 1946년 1월 1일, 그는 훈춘현당위 공안국 및 분국의 전체 인원들을 상대로 정돈훈련을 진행하는 기회를 교묘하게 리용하여 훈련에 참가하는 인원들의 총과 탄약을 거둬들였으며 괴뢰경찰들을 골간으로 하여 조직된 공안국 무장을 해제한다고 선포했다. 또한 원유의 경비무장을 새롭게 편성했다. 같은 해 1월 상순, 훈춘현 경비대대가 설립되였으며 한석도는 경비대대 정치위원을 겸임했다. 한석도의 령도하에 훈춘현당위는 적시적으로 적들의 ‘지하건군’ 의도와 무장폭동 계획을 발견했으며 경비대대에 잠입한 적들의 우두머리인 관내균 등 반동분자들을 체포함으로써 한차례 반란을 진압했다.
1946년 3월 17일, 한석도는 연변행정감찰전원공서에 가서 사업을 회보한 후 전원공서 민중운동사업대에 남아 일하게 되였다. 같은 해 6월, 한석도는 길림민주학원 주임으로 부임되였다. 1947년 12월, 그는 길림대학 비서처 처장으로 부임되였으며 이후 길림성립제2중학교(지금의 길림시실험중학교) 교장, 성립길림사범학교 교장, 길림성행정간부학교 교장을 력임했다. 1955년 5월, 장춘시제2고중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56년 9월, 길림성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했다. 1963년에는 길림성박물관 보관부 주임을 맡았다. 한석도는 1969년 9월 12일에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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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민호(1904—1970)
조선족, 조선 함경북도 회녕군에서 태여났다. 20세기 20년대초, 혁명에 뛰여들었으며 초기 동만지구청년운동의 지도자중 한사람이다. 1923년 1월, 고려공산주의청년회에 참가했으며 1926년 6월,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1928년 9월,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주의대학에 파견되여 공부했다. 1932년 5월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가 국제적색로동조합을 세웠다. 194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돈화현 부현장, 《길림일보》 부총편집, 《연변일보》 총편집을 력임했다. 1948년 12월, 연변대학건설계획위원회 부주임을 맡았다. 그는 연변대학 주요창시자중 한사람이다. 1949년 3월, 연변대학이 설립되자 그는 부교장을 맡으면서 20여년 동안 전교 일상사업을 주최했다. 그는 길림성인대 대표, 길림성 제2기, 제3기 정협위원, 연변정치협상회의 제1기, 제2기, 제3기 위원이다.
 
1904년 1월, 림민호는 조선 함경북도 회녕군의 한 빈농가정에서 태여났으며 그해, 부모님을 따라 연길현 룡정촌으로 이주했다. 1920년, 림민호는 룡정동흥중학교에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맑스주의사상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1923년, 동흥중학교의 맑스주의비밀사단인 ‘고려청년회’에 가입했으며 혁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29년 9월, 림민호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파견을 받고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주의대학에 가서 학습했다. 1932년 5월, 졸업 후 림민호는 조선의 함흥에 가서 홍색공회를 건립하는 일에 착수했으나 후에 체포되여 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1940년 9월, 출옥한 림민호는 화룡현 동성촌 고성툰에 갔다가 후에는 또 돈화에 가서 생활했다. 1945년, 항일전쟁 승리 후 림민호는 돈화현에 주둔해있는 쏘련홍군 사령부에서 번역과 련락 사업을 맡았다.
1945년 10월, 림민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6년 3월, 중국공산당은 돈화현에 새 정부를 건립하고 림민호는 부현장으로 임명되였으며 동시에 당의 외곽조직인 돈화민주대동맹의 위원장에 추천되였다.
1948년 12월, 림민호는 연변대학 건교사업을 구체적으로 책임지게 되였다. 1949년 3월 20일, ‘연변대학 설립대회 및 개학식’이 연길시 쓰딸린극장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였다. 당조직의 결정에 따라 주덕해와 림민호는 각기 연변대학의 교장과 부교장에 임명되였다. 이후 18년 동안 림민호는 연변대학의 발전에 자신의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림민호는 ‘인재양성, 과학연구, 사회봉사’를 연변대학의 ‘세가지 큰 사명’으로 설정했다. 연변대학 창립 초기에 림민호는 ‘건교 10대 총강령’을 제정했는데 당의 교육방침을 정확히 관철하고 제반 교육제도를 집행하며 교육임무를 완수하고 간고분투, 근검절약하는 것으로 대학 발전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하며 전심전력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등 강령을 명확하게 제기했다.
1950년 10월 1일, 림민호는 연변의 여러 민족 대표들을 이끌고 북경에 가서 새 중국 창건 1주년 기념활동에 참가하고 친히 모주석께 기념품을 증정했다. 당의 민족정책은 림민호를 크게 감동시켰으며 그로 하여금 민족단결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했다. 림민호는 교육실천에서 민족단결, 민족융합을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림민호가 교내사무를 처리하는 동시에 교수들과 학생들의 생활을 힘껏 관심해준 이야기들은 연변대학에서 회자되고 있는 미담이다. 이처럼 림민호는 큰일,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였으며 사생들을 관심하여 그들의 좋은 친구이며 훌륭한 스승이 되였다. 그는 성격이 진실하고 소박하며 흉금이 넓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사귀여 몇세대 연변대학 사람들의 마음속에 ‘우리의 림교장’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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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준언(1885—1971)
자는 선정이고 시버족이며 료녕성 개원현 사람이다. 1913년, 연길현 룡정소학교 교장을 맡았다. 1915년, 그는 연변 각 현의 농, 공, 상업계 인사들을 련합하여 원세개가 일본과 ‘21조’ 매국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반대하고 1916년, 원세개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는 것을 규탄하는 투쟁에 참가했다. 1919년 3월, 조선반일민족독립운동 성원에 참가했으며 1924년 12월, 화룡현교육국 국장을 맡았다. 1928년, 《민성보》사 사장을 맡았는데 중국공산당이 연변에서 건립하는 데 중대한 공헌을 했다. 1928년 10월, ‘반일호로련합회’ 대표로 추천되여 길림, 봉천에 가서 청원활동에 참가했다. 193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5년 이후, 연변행정공서 전원을 맡았고 새 중국 창건 후에는 길림성고등법원 원장, 길림성 부성장, 길림성정협 부주석 등을 력임했다.
 
1913년, 연길현 룡정촌소학교에서 교장을 맡았으며 1915년, 연변 각 현의 농, 공, 상업계 인사들을 련합하여 원세개가 일본과 매국의 ‘21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반대했다. 1916년, 그는 원세개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는 것을 규탄하는 투쟁에 참가했다. 1913년 3월, 4월에는 조선 ‘3.1’반일독립운동을 성원하는 각종 활동에 참가했다. 1922년, 관준언은 두만강수리공사의 경리를 맡았다. ‘협강’을 되찾기 위해 그는 일본측과 여러차례 교섭했다. 끝내 핍박에 못이긴 일본인은 ‘협강’은 중국 령토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승인하게 함과 동시에 더는 월경하여 조선족 농민들로부터 조세를 받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아냈다.
1924년 12월부터 1931년말까지 관준언은 화룡현교육국 국장을 맡았다. 이 기간 관준언은 흥학항일의 결심을 안고 인재를 모집했으며 애국사상을 가진 인사들을 연변으로 초빙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다. 이중에는 북경향산자유원사범학교 졸업생 40여명(이중 공산당원과 공청단원 17명이 포함)을 초빙한 것도 포함된다. 이는 연변에서의 중국공산당  건립을 위해 중요한 공헌을 했다.
1928년 1월, 관준언은《민성보》사 사장, 화룡현교육국 국장이라는 이중신분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1928년 10월 상순, 일본은 ‘만몽오로(满蒙五路)’를 수축하겠다는 무리한 요구를 제기해왔다. 소식이 전파된 후 연변인민들은 일떠나 반항했다. 10월 15일부터 연변 4개 현의 각 단체들에서는 ‘반일호로련합회’를 조직했으며 관준언 등을 대표로 선거하여 길림, 봉천 등 곳에 가서 청원활동에 참가했다.
1929년 이후, 봉계군벌과 일본침략자들은 동북인민의 반일애국운동에 대해 더욱 심한 진압을 들이댔다. 관준언은 선후로 류건장, 조지강 등 20여명 공산당원과 혁명자들을 엄호하여 연변을 떠나게 했다.
1932년, 관준언은 연변을 떠나 북평으로 갔다. 5월, 한고향 사람의 추천으로 산서성건설청 비서 겸 시찰원으로 일하게 되였다. 1936년 봄, 관준언, 동곤일, 주공장은 각종 관계를 통해 적들에게 체포된 공산당원 왕지걸, 왕길인, 리연년 등을 옥에서 구출했다. 6월, 관준언은 북평으로 돌아갔으며 8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5년 항일전쟁 승리 후, 관준언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길림성으로 돌아와 사업하게 되였다. 11월 20일, 길림성 연변행정감찰전원공서가 설립되고 관준언은 전원을 맡았다. 관준언은 ‘연변의 동포들에게 고함’을 발표하고 “일본괴뢰잔여와 토비들을 철저히 숙청하고 민주평등과 민족단결을 실행하자”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10대 시정방침을 공포했으며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들이 단결일치하여 자유롭고 행복한 새로운 연변을 건설하기 위해 분투할 것을 호소했다. 이때로부터 연변인민은 당의 령도하에 새로운 혁명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45년 12월 27일, 관준언은 장춘으로 부임되여 길림성민정청 청장을 맡았다. 1948년 6월 17일, 관준언은 조직의 지시에 따라 길림성고등법원을 세우고 원장을 담임했다. 새 중국이 창건된 이후, 관준언은 길림성인민정부 부주석, 길림성 부성장, 길림성정협 제3기 위원회 부주석 등 직무를 력임했다. 1971년 1월 9일에 서거했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취
(다음기 계속)
박진화 편역
작가: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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