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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3-10-07 10:17:30 조회

(전호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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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영(1918—1996)
강소성 소주시 사람이다. 193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44년에 신4군 유격대대 정치위원을 지냈다. 항일전쟁 승리 후, 전인영은 조직의 배치로 동북에 가서 사업했다. 중공왕청현 배초구위 서기, 구장 겸 토지개혁공작대 대장을 지내다가 중공도문시위 서기, 중공왕청현위 서기 겸 중공연길현위 서기를 력임했다. 1955년, 중공연변주위 부서기 겸 부주장을 맡았고 1978년에 주당위 제2서기 겸 주정협 주석을 력임했다. 1996년 3월, 전인영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인영은 강소성 소주시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6살에 사숙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12살에 상해비단공장에서 아동공으로 일했다. 1930년, 자본가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강서 횡봉으로 건너가 홍군에 입대했다. 입대하자마자 반장에서 패장으로 승진했고 공청단에 가입했다. 1933년 가을, 전인영은 홍군총병원 정치처 단지부 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1934년 11월, 한차례 전투에서 대오와 련락이 끊긴 뒤 고향으로 돌아와 탄광과 제분공장에서 로동자로 일했다. 서안사변이 일어난 후 팔로군은 남경과 상해에 판사처를 세웠다. 판사처의 노력으로 그는 부대와 련락을 취할 수 있었다. 그는 조직의 비준을 받고 연안의 섬북공학에 가서 공부했다. 1938년 5월, 당조직은 그를 남창의 신4군 판사처에 파견해 근무하게 하다가 후에 3지대 5퇀의 정치처 선전간사로 전근시켰다. 9월, 전인영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0년 2월, 3지대 강북정진퇀 4련으로 전근되여 지도원을 담당했다. 1944년, 전인영은 부대를 이끌고 팽택에 도착해 중공팽택현위를 설립하고 조직부 부장을 맡았다. 그해 10월, 신4군 유격대대가 설립되였고 전인영은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였다.
항일전쟁 승리 후 전인영은 조직의 배치로 동북으로 가서 일하며 중공왕청현 배초구위 서기, 구장 겸 토지개혁공작대 대장을 지냈다. 그는 여러 민족 농민들을 이끌고 지주와 투쟁하고 토지를 나누었으며 여러 민족 농민들이 해방되도록 했다. 1947년 10월, 중공도문시위 서기로 전근했다가 1948년 5월, 중공왕청현위 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1950년 4월, 중공연길현위 서기로 부임했다가 1953년 4월, 중공연변지위 비서장 겸 조직부 부장으로 임명되고 중공연변지위 비서장 겸 규률검사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였다. 1955년 12월, 중공연변주위 부서기 겸 부주장으로 임명되였고 1960년 12월에 주당위 서기처 서기 겸 부주장으로 임명되였다.
1972년 11월, 전인영은 중공연변주혁명위원회 부주임 겸 주당위 상무위원으로 임명되였다. 1977년 12월, 중공연변주위 부서기로 임명되였고 1978년 1월에 중공연변주의 제2서기로 임명되였다. 후에 또 주정협 주석을 겸임했다. 전인영은 1996년 3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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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자(1937—1996)
녀, 조선족, 료녕성 개원현 사람이다. 197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안도현병원의 부산과 의사로서 박순자는 30여년간의 의사생활중 10번의 설을 병원 수술대에서 보내면서 1만여명의 어린 생명을 직접 맞이하고 2000여명의 여러 민족 녀성들의 생명을 구했다. 그는 전국3.8붉은기수, 전국위생선진사업일군, 전국계획생육선진사업일군, 전국우수공산당원 및 성, 시 모범공산당원 및 특등로력모범, 5.1로동메달, 변강의 우수아들딸 은상 등 영예칭호와 상을 획득했으며 제13차 전국대표대회 대표이다. 1996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37년 10월 12일, 박순자는 료녕성 개원현의 한 가난한 조선족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57년 7월, 통화현조선족고중을 졸업할 때 그녀는 당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안고 학교 당지부에 첫 입당신청서를 바치며 영원히 당을 따를 것을 맹세했다. 그해 9월, 박순자는 연변의학원에 입학하여 학급 단지부 조직위원을 맡았다.
1962년 8월, 박순자는 졸업할 때 간곡한 마음을 담아 지원서를 썼다. “당이 저를 제일 필요로 하고 제일 간고한 곳에 가서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훌륭한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해 10월, 그녀는 편벽한 산간지역의 안도현병원에 배치되여 부산과 의사로 일하게 되였다. 사업에 참가한 후 그녀는 일부 녀성들이 병으로 고통받는 모습, 심지어 난산이지만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해 소중한 생명을 잃는 녀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강한 동정심과 책임감을 느꼈다. ‘산간지역에 자리 잡고 변강에 뿌리 내려 그간 배운 지식으로 산간지역 인민을 위해 기여하자. 실제행동으로 가장 아름다운 추구를 실천하자!’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의사로서 가장 큰 영광은 환자가 시름 놓고 자신의 생명을 의사에게 맡기는 것이다. 하기에 단 1%의 희망만 있어도 100%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인민의 훌륭한 의사가 되려면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 의료기술도 부단히 향상시켜야 한다.” 이는 박순자의 좌우명이자 30여년간 의료사업에 종사하면서 얻은 귀중한 경험의 결정체이다.
1968년, 자궁외임신 파렬 중증환자가 심각한 쇼크상태에 처해 병원으로 실려왔다. 관례 대로라면 반드시 먼저 수혈을 하고 환자가 깨여나야 수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병원에는 혈액저장고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술하는 것은 지대한 위험을 무릅쓰는 행위였다. 그녀는 응급조치를 취하는 한편 혈액원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환자는 혈액원을 구한 순간 바로 숨을 거두었다. 혈액저장고가 없는 산간병원에서는 어떻게 이 난제를 극복할 수 있을가? 그녀는 다방면으로 자료를 수집했지만 관련 병례는 몇몇 큰 병원의 경험이며 쇼크환자에게 ‘자체혈수혈(自血回输)’을 한 전례는 어디에도 없었다. 박순자는 락담하지 않고 겸손하게 경험이 많은 동료들에게서 배우며 부지런히 탐색했다. 1976년, 박순자는 솔선하여 한 쇼크산모에게 ‘자체혈수혈’방법을 적용했는데 수액을 진행하면서 개복했다가 혈압이 회복된 후 병변을 잘라냈다. 수술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9년 3월, 박순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박순자는 의학의 고봉을 향해 한단계 한단계 힘겹게 올랐다. 다년간의 림상치료실천에 근거하여 그는 <수란관임신 파렬에 관하여> 등 11편의 학술론문을 썼다. 거의 매일 류혈상황과 싸우는 부산과 의사로서 1분 일찍 도착하면 산모가 그만큼 피를 적게 흘린다. 박순자는 거의 달리다싶이 걷는 습관이 생겼고 험한 산길에도, 궂은 날씨에도 진료를 거부한 적이 없었다. 이웃들의 휴식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그녀는 밤중에도 집문을 걸어두는 법이 없었고 옷과 양말은 착용하는 순서 대로 놓아두어 부름을 듣자마자 최단시간에 출발할 수 있도록 했다. 지어 임신 9개월 때에도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 왕진을 나갔다. 이렇게 귀중한 치료시간을 절약한 덕분에 그녀는 많은 산모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무사히 구해올 수 있었다.
박순자의 휴일은 언제나 이런 식이였다. 1981년 설날, 량강에 가서 자간환자 한명을 구했고 1982년 설날에는 한 개인산부인과병원에 가서 위독한 환자를 구했다. 1983년 설날에 병원에서 당직을 섰고 1984년 설날에는 산후 대출혈로 쇼크가 온 환자를 치료했다. 1985년 설날에 병원에서 당직을 섰고 1986년 섣달 그믐날에는 위독한 산모를 응급처치했으며 1987년 설날에는 난산 환자를 구하기 위해 밤을 꼬박 새웠다. 1988년 섣달 그믐날 밤에는 박순자가 집에서 만두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올해는 가족과 함께 설을 보내는 줄 알고 이웃들이 모두 신기해했으나 후에 알고 보니 빚은 만두를 환자에게 보냈다. 박순자는 지어 세번의 출산휴가 기간마저도 모두 환자들을 위해 봉사했다. 그녀는 환자를 위해서라면 안도현 13개 향진과 수십개의 외딴 마을을 어디라 없이 돌아다녔다. 30여년 동안 그녀의 두 손으로 받아안은 어린 생명은 1만명 이상, 그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여러 민족 녀성은 2000명을 웃돌았다. 그녀는 신근한 땀과 뛰여난 의료기술로 조직의 신뢰와 산간지역 사람들의 존경을 바꿔왔다.
“저는 늘 공산당원으로서 당과 인민에 대한 기여가 적고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1986년에 박순자가 전국우수공산당원 선진사적 교류회에서 한 말이다. 다년간 바쁘게 뛰여다니며 쌓인 피로가 질병이 되여 박순자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였다. 1996년, 박순자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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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천(1911—1997)
길림성 연길시 사람이다. 1934년에 북경대학에 입학하고 1935년에 북평의 ‘12.9’운동과 ‘12.16’ 학생애국운동에 참가했다. 전국적인 항전이 폭발한 후 연안으로 갔으며 193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공부했다. 항일전쟁시기, 팔로군 산동항일군정간부학교 정치처 주임 겸 지부서기, 산동성부순시단 책임자 등 직무를 력임했다. 항일전쟁 승리 후, 동북으로 돌아와 길림성정부 비서장 겸 연변행서 전원, 당조 부서기, 길림성 길동행서 전원, 당조서기 등을 력임했다. 새 중국이 창건된 후 길림성농림청 청장, 길림성인민정부 부주석, 길림성 부성장, 중공길림성위 상무위원, 중공중앙 동북국 위원, 중공중앙 동북국 농촌사업위원회 부주임, 주임, 농업부 부부장 겸 중국농업과학원 당조서기 및 부원장을 력임했다.
 
1950년, 《길림정보》에서 길림성농림청 청장으로 있던 서원천을 인터뷰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의 대표로서 우리는 과거처럼 인민을 위해 충성하고 인민의 공복이 되여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는 더욱더 인민들의 의견과 요구를 겸허히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각 계층의 대표들은 정부사업의 각 면에 존재하는 모든 결함을 지적하여 정부사업이 한단계 향상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인민의 심부름군이 되자’는 것은 서원천 평생의 좌우명이였다.
장기간 농업분야의 지도자 직무를 맡은 서원천은 항상 실제에 심입하여 조사와 연구를 중시했다. 특히 길림성과 동북국에서 사업하는 동안 길림성과 동북지역의 농업과 농촌경제를 개척, 발전시키기 위하여 많은 창조적인 사업을 했다. 그는 농업, 림업, 목축업, 부업, 어업의 전면적인 발전을 주장했다. 농업 면에서 그는 재배업의 구조성 조정에 주의를 기울여 ‘알곡과 잡곡의 병행’을 제기했고 축산업 면에서는 ‘현지 품종을 보호하고 외래 우세 품종을 적극 도입하여 실제 수요에 따라 개량하자’는 의견을 제기하고 직접 조직, 실시했다. 특색산업 면에서는 국내에서 솔선으로 ‘야생 동식물을 집에서 키울 수 있게 바꾸자’는 의견을 제기하고 길림성좌가특산연구소와 좌가특산학원을 설립했다. 어업 면에서는 ‘송화호와 같은 모든 사용 가능한 물자원을 합리적으로 활용하자’는 의견을 제기하여 송화호 어장을 조성하고 성내의 비교적 큰 월량포 어장을 복원하여 길림성에서 ‘어류 양식은 자연에 의존하고 식용 생선은 강남에 의존하던’ 국면을 개변하는 데 토대를 마련했다.
서원천은 농업기계화의 길이 농업을 발전시키는 데서 홀시할 수 없는 경로라고 여겼으며 ‘기계화를 중심으로 하고 농업, 림업, 목축업을 결합하여 안정적이고 높은 수확을 이룩한다’는 기술경험을 총화했다. 이는 당시 길림성과 동북지역의 농업생산에 큰 역할을 했다. 서원천은 집중농업의 실체인 국영농장 설립을 매우 중시하면서 많은 국영 농장, 목축장, 어장을 건설하여 전 성의 농지개간경작사업 발전에 견고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농업의 꾸준한 발전에 조건을 마련하기 위하여 길림성 농업과학 연구, 교수, 대중화 체계를 구축하고 장백산 야생자원의 보호와 리용을 위해 전략적 대책을 내놓으며 길림성 림업관리가 규범화, 제도화, 법제화로 나아가도록 토대를 닦는 등 세가지 큰일을 틀어쥐였다.
중국농업과학원 당조서기를 겸임하는 동안 서원천은 혼란사태를 바로잡고 시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사업을 하면서 중국 농업과학원이 활기를 되찾고 1980년대 후로 큰 발전을 가져오도록 토대를 마련했다.
1997년 1월 3일, 서원천은 북경에서 별세했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사명》에서 발취
(다음기 계속)
오수란 편역
작가: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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