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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4-02-07 13:48:19 조회

91마헌화(1963-)
녀, 만족으로 길림성 훈춘시 사람이며 공산당원이다. 1980년 8월에 사업에 참가, 1994년부터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1996년, 홀로 깊은 산속에 들어가 흙벽돌창고에 과수신촌소학교를 꾸리고 3개 학년 5~11세 학생들의 모든 과목을 담당했다. 산 네개를 에돌고 강 다섯개를 건너 날마다 왕복 33킬로메터의 산길을 주름잡으며 아이들의 수업을 한시간도 빠뜨리지 않고 꼬박 12년을 견지했다. 마헌화는 “학생이 있는 한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청춘과 땀으로 실천함으로써 새 시기 인민교원의 정신풍모와 고상한 스승의 덕을 한껏 펼쳐보였다. 선후로 전국 선진 녀성종업원, 전국 3.8붉은기수, 전국 사덕 기준병, 전국 모범교원, 전국 중소학교 우수 담임, 전국 중소학교 10대 걸출교원 칭호를 받았다. 길림성당위, 성정부로부터 ‘산간지역 인민들의 훌륭한 교원’, 길림성 로력모범, 우수공산당원, 길림을 감동시킨 10대 인물 등 영예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대표이다.
 
20세기 90년대, 연변주림업관리국에서 훈춘시 북부의 여러 민둥산에 연변과수농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과수원을 도급 맡기 위해 각지에서 20여가구 농가가 교통이 막힌 이 산속에 모여 살게 되였다. 과농들은 정식 호적이 없어 부근의 어느 향진에도 소속시킬 수 없는 데다 깊은 산속이라 길이 멀기에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이 큰 문제로 되였다. 1996년 7월, 훈춘시교육국 감독지도실 량조희 주임이 신지방소학교의 민영교원 마헌화를 찾아가 과수신촌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것을 제안했다. 마을의 10여명 학령아동들이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다는 상황을 료해한 그는 의연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996년 8월 25일, 과수신촌 20여가구 과농들은 마헌화를 기쁘게 맞이했다. 소박한 개학식이 끝나고 마헌화는 과수신촌소학교의 유일한 교원으로 되였다.
집과 학교의 왕복거리는 33킬로메터, 편도만 꼬박 3시간이 걸려야 했다. 겨울이면 큰눈이 산길을 덮어버리기 일쑤여서 어림짐작으로 ‘길을 더듬으며’ 학교로 가야 했고 봄과 가을에는 질척거리는 산길에 장화까지 물이 차올라 맨발로 살얼음이 뒤덮인 강물을 건너야 했다. 여름에 장마가 시작되면 강물이 불어나 세찬 물결이 그와 자전거를 몇메터 밖에 팽개친 적도 있었다. 행인의 도움으로 그는 간신히 기슭에 올라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0여년 동안 마헌화는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엄동설한이든 혹서든 상관없이 땀과 눈물로 얼룩진 네개의 ‘2만 5천리’를 걸어오며 단 한번도 학생들의 수업을 빼놓은 적이 없었다. 그는 교실 문 앞의 작은 공터를 학교 운동장으로 다듬고 매주 월요일마다 10여명의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서 국기게양식을 진행하며 애국주의교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헌화는 교수요강을 엄격하게 준수했고 소학교에서 꼭 필요한 7개 과목(영어 제외)을 모두 개설했다. 그는 아이들이 간고한 학습조건에서 락오되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으며 생활면에서는 아이들에게 무한한 배려를 해주었다. 농사일에 바쁜 학부모들이 아이를 돌볼 수 없으면 마헌화는 선생님 역할도, 부모 역할도 모두 도맡아 했다. 학생들은 모두 그를 ‘선생님 엄마’라고 친절하게 불렀다.
그는 학교의 아이들을 위하여 자기가 응당 돌봐야 할 ‘작은 집’을 희생했다. 그에게 심산 속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혜를 키워준 것이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라면 그를 가장 미안하게 한 것은 자기 가정과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것이였다. 10여년 동안 마헌화는 가정과 아이를 돌보는 것을 포기하고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산에, 아이들에게, 교육사업에 바쳤다.
2004년 3월, 그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2008년 8월, 마헌화는 상급의 배치에 따라 과수신촌소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훈춘시제1소학교에 합병되였다. 훈춘시제1실험소학교에서 8년 남짓이 사업하는 동안 그는 여전히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헌신하며 열심히 책임지고 성실히 사업하는 다년간의 사업작풍을 유지하여 사생들의 찬사를 받았다.
“평생 인민교원으로 사는 것은 저의 꿈이고 학교에 다니는 것은 산간지역 아이들의 꿈입니다. 저의 꿈으로 아이들의 꿈을 점화시켜 그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은 발전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헌화 교원은 자신의 실제행동으로 이 맹세를 가장 훌륭하고 가장 완벽하게 해석했다.
 
92왕의승(1947-)
길림성 왕청현 사람이다. 197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74년에 계관촌 기업대 대장, 1978년에 계관촌촌민위원회 부주임, 1998년에 계관촌 당지부 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을 맡았으며 2010년부터 2018년까지 왕청현 계관향 계관촌당지부 서기로 있었다. 40여년 동안 그는 꾸준히 노력하고 사심 없는 봉사로 마을 사람들에게 ‘빈곤해탈 치부의 선두주자’라고 친근하게 불리웠다. 1996년 주인대 대표로 당선, 2002년 6월에 제8기 길림성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다. 2006년 4월, 제1기 감동연변 10대 인물, 제1기 전 주 10대 우수 촌민위원회 주임으로 선정되였다. 2009년, 길림성 특등로력모범, 2010년 전국로력모범, 2014년 길림성 훌륭한 이, 2016년 전 주 우수공산당원으로 평의되였다.
 
20세기 80년대, 왕의승은 계관촌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곡식농사를 짓고 토지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시키지 못한다면 농업의 효익을 높이고 농민의 수입을 증가하겠다는 것은 빈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했다. 1987년, 왕의승은 전체 촌민들을 이끌고 식수조림을 시작했다. 27년 동안 마을의 800여헥타르에 달하는 민둥산은 푸른 단장을 하고 인당 1300여그루의 나무보유량을 자랑하게 되였으며 계관촌은 연변주 최초의 ‘만무 인공림’의 마을로 되여 총 2700만원의 가치를 이루었다. 이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자 그의 평생 사업이기도 했다.
산에 키운 림목들이 효익을 본 후 그는 리윤을 마을의 시설개조에 투입했다. 빈곤호의 원래 초가집들을 허물고 한채 또 한채의 번듯한 기와집을 지어주었으며 좁고 파손된 촌길을 넓고 평탄한 세멘트길로 바꾸었다. ‘바람이 불면 흙먼지가 날리고 비가 오면 흙탕물이 넘치던’ 계관촌은 면모가 완전히 일신되였다. 촌민들이 식수조림에서 얻은 수익을 모두 향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왕의승은 리윤을 촌민들의 복리에 투자했다. 련속 4년간 촌민들은 도합 10만여원의 의외상해보험에 가입했고 2003년부터는 마을의 극빈호, 제대군인 및 70세 이상 로인을 위해 매년 인당 200~600원씩 보조해주었다.
왕의승은 시종 빈곤호를 이끌고 치부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간주하면서 산업구조 조정의 발걸음을 쉬임없이 다그치고 검정귀버섯, 잎담배 등 경제작물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추진하에 계관촌에서는 선후로 담배재배, 누에양식, 식용균양식, 돼지사육 등 협회를 세워 전 촌의 각종 산업 발전을 이끌었으며 마을의 인당 소득은 과거의 3200원 미만으로부터 1만 2000원 이상으로 상승하여 전 향 첫자리를 차지했다.
빈곤호와 독거로인을 돌보는 것도 왕의승의 중요사업중 하나였다. 맹인 촌민 교부화네 집이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왕의승은 즉시 자기 돈을 내고 지부 성원들을 조직하여 그녀에게 벽돌집을 지어주었다. 그는 또 84세 독거로인 왕립명을 책임지고 보살피는 중임을 어깨에 짊어졌다. 향정부로부터 개인특수기여 장려금 1만원을 받은 왕의승은 가장 먼저 마을의 빈곤호들을 떠올렸고 상금으로 쌀과 밀가루 등을 구입해 빈곤호에게 나눠주었다. 왕의승은 농촌 위험주택개조 정책에 근거하여 마을의 36개 위험주택을 새 주택으로 탈바꿈시켰다.
빈곤층부축 정책이 끊임없이 개선됨에 따라 향당위와 정부에서는 심층 조사연구를 거쳐 계관촌에 ‘검정당나귀 양식 빈곤층부축 대상’을 도입하기로 했다. 70여세의 왕의승은 부지런히 뛰여다니며 장소를 고르고 양식장을 지으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양식장 건설이 끝나고 80마리의 암나귀를 들여왔다. 첫패의 암나귀들이 순조롭게 10여마리의 건강한 새끼를 출산하자 왕의승은 마을의 빈곤해탈사업이 또 한걸음 내딛게 되였다며 기뻐했다.
 
93박문일(1932-)
조선족으로 길림성 룡정시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으며 195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82년부터 1998년까지 연변대학 교장으로 16년간 재직하면서 연변대학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 걸출한 공헌을 했다. 그는 시종 사회주의 학교운영방향을 견지하고 당의 교육방침을 관철, 시달하며 합격된 인재 양성을 견지했다. 그는 정치가의 흉금, 개혁가의 기백과 전략가의 안목으로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추어 연변지역 5개 고등학교를 합병하고 연변대학을 국가 ‘211공정’ 중점건설 행렬에 들어서도록 이끌었다. 그는 20세기 중국 조선족의 저명한 교육가로서 제6차, 제7차 전국인대 대표, 전국 군영회 대표로 당선되였고 전국교육계통 로력모범, 전국교육계통 선진사업일군 등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국무원 특별수당금을 받는다. 박문일은 201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돐을 즈음해 중공중앙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에서 발급하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돐 경축 기념메달을 수여받았다.
 
1952년, 박문일은 연변대학 첫기 졸업생으로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았고 이듬해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후 력사학과 학부장, 정치력사학부 당총지 서기 겸 학부장, 학교 교무처 처장, 과학연구처 처장, 조선력사연구소 소장 등 직무를 맡았다. 그는 본과생, 연구생의 력사과학리론, 고대중조일관계사, 중외관계사, 중국고대사 등 과정의 교수임무를 맡은 외에 과학연구사업에 몰두하여 매우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성급, 국가급의 많은 과학연구 프로젝트를 주관하고 국내외 간행물에 영향력이 큰 론문, 저작 등 10여편을 발표했다.
1982년 12월, 박문일은 연변대학 교장으로 임명되여 장장 16년간의 교장 생애를 시작했다. 이 기간 박문일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 멀리 내다보고 장원지책을 세우며 전반 국면을 어우르는 높이에서 연변대학의 아름다운 미래를 계획했다. 그는 인재 양성, 학과 발전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인재양성, 과학연구, 사회봉사라는 대학의 세가지 기본임무를 잘 틀어쥐였다. 그는 시종 ‘특색과 우세를 틀어쥐자’는 학교운영리념을 견지하고 연변대학 고유의 학과 우세를 충분히 발휘했다. 일련의 학술연구분야의 개척과 학술교류무대의 구축으로 연변대학은 대체할 수 없는 학술연구의 지위를 확립했다. 1993년 12월 17일, 연변대학은 국무원 학위위원회의 비준하에 ‘세계지역사-나라별 력사’ 전공이 박사학위 수여권을 획득했고 박문일 교수는 박사생 지도교수로 되였다. 이는 연변대학의 발전사에서 심원한 력사적 의의와 현실적 의의를 지닌다.
1996년은 연변대학 발전사에서 획기적인 의의가 있는 한해이다. 이 해에 연변대학은 두가지 리정표를 세웠다. 하나는 6월 15일, 연변지역의 5개 고등학교가 실질적으로 통합되여 새로운 연변대학을 설립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2월 25일, 국가 ‘211공정’ 부문 예심을 순리롭게 통과하여 21세기를 지향하는 국가 중점건설 100개 대학의 반렬에 들어선 것이다. 연변대학은 우리 나라에서 학과분야가 가장 구전하고 민족특색이 선명한 종합성 대학으로 되였다. 합병 후의 연변대학은 참신한 풍모로 왕성한 생기와 활력을 나타냈다. 교수와 과학연구에서 자기 특색과 우세를 형성하고 대외 교류와 협력을 끊임없이 확대하면서 력사상 가장 좋고 빠른 발전시기에 들어선 연변대학은 21세기 비약과 발전을 위해 튼실한 토대를 닦아놓았다.
박문일은 연변대학 설립 후 제1기 졸업생으로서 70여년간 연변대학이 없었다가 있고, 작았다가 커지고, 갈라졌다 합쳐지는 험난한 발전과정을 지켜보며 연변대학의 ‘살아있는 학교력사’로 불리운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사명》에서 발취
(다음기 계속)
오수란 편역
작가:장홀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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