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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4-03-21 16:41:26 조회

(전호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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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강(1914-)
산동성 기수현 사람으로 1945년 3월에 팔로군에 참가하여 반장, 패장, 부련장을 력임했다.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했으며 해방전쟁시기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53년 12월, 40군 119사에서 제대하여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었다. 1970년에 아들과 함께 돈화시 대석두진 민강촌에 가서 생활했다. 2015년 9월 3일, 중국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쑈전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되여 북경에서 중공중앙 총서기,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습근평 동지의 친절한 접견을 받았다.
 
손정강은 군대에 가기 전 산동성 기수현 후곽가장촌 촌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일본괴뢰군이 밤낮으로 마을에 내려와 민부들을 잡아 동북으로 이송하거나 탄광로동자, 길닦이대 일군, 수리공으로 부렸다. 촌민들은 밤낮으로 몸을 피하느라 농사일도 못하고 집에도 돌아가지 못했다. 손정강의 어머니는 그에게 “얼른 입대하거라. 누구나 군대에 가지 않겠다고 하면 이 나라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고 말했다. 안해도 “참군하세요. 일본군을 몰아내는 그날 우리 가족이 다시 함께 모입시다.”고 했다. 손정강은 11명의 촌민을 이끌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심과 가족의 기대를 안은 채 팔로군 기몽산 4퇀에 가입했다. 그는 11명의 전사를 데려왔기에 반장으로 임명되였고 동정현(현재 산동성 기수현 소속)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동정현 공략 전투는 사흘 밤낮으로 이어졌다. 성벽 아래 또치까 안에서 적의 2개 기관총이 밖으로 란사하는 바람에 전진하던 부대는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전우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모습을 본 손정강은 조급해났다. 그는 생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에 바줄을 매고 바줄 다른 한끝에 80근짜리 폭파약을 묶은 후 두 기관총이 사격하는 사각지대로부터 또치까에 접근했다. 겨우 또치까에 다달은 그는 또치까를 등진 채 있는 힘껏 폭파약을 옆으로 끌어당겨 또치까의 담모퉁이에 놓은 후 도화선을 잡아당기는 동시에 몸을 피했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또치까가 폭파되고 또치까 안은 아수라장이 되였다. 뒤이어 전우들이 돌진해오자 적들은 끝내 투항했다. 성벽이 뚫리고 부대가 현성에 쳐들어가 성안의 수비군 300여명을 섬멸하면서 전투는 마침내 승리로 끝났다. 부대가 동정현을 점령한 후 정돈, 총화 대회에서 손정강이 적의 또치까를 폭파한 것을 전공으로 인정했다.
기수현은 당시 동정현에서 북쪽으로 25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적들은 물샐틈없는 방어를 하고 있었다. 기수현 공략 전투에서 기몽산 4퇀이 주요공격임무를 맡고 9퇀이 저격임무를 맡았다. 4퇀은 동쪽, 남쪽, 북쪽 세 면으로부터 기수현성을 포위하고 9퇀은 현 서쪽에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4퇀이 산포로 사흘 련속 성내를 공격하자 지원군도 없고 탄약도 부족해진 성내 적들은 조심스런 정찰 끝에 서쪽으로 철퇴했다. 그러자 아군 공격부대인 4퇀이 그 뒤를 바싹 따르고 저격임무를 맡은 9퇀이 매복범위에 든 적들을 가로막고 진공하며 두개 퇀이 사면에서 포위하여 적들을 호되게 족쳤다. 800여명에 달하는 일본괴뢰군은 모두 섬멸되였고 나흘 밤낮의 전투 끝에 기수현성은 끝내 해방되였다.
항일전쟁 승리 후, 손정강은 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했다. 그는 크고작은 전역에서 영용하게 싸워 선후로 8개의 메달과 기념메달을 수여받았다.
1953년 12월에 손정강은 제대했다. 조직에서 그를 흑룡강성 칠대하탄광에 배치했지만 그는 자신이 문화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여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었다. 1970년, 그는 자녀들과 함께 돈화시 대석두진 민강촌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전공을 내세우지 않고 늘 부지런히 일하고 묵묵히 봉사했다.
2015년 9월 2일, 손정강은 북경인민대회당에서 항일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중의 한명으로 습근평 총서기가 수여하는 ‘중국인민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메달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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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수림(1953-)
길림성 돈화시 사람이다. 1970년 2월에 사업에 참가하고 1984년 9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현재 길림성오동약업집단주식유한회사 리사장, 연구원이다. 1982년, 리수림은 연변오동제약공장 공장장을 맡으면서 오동을 개혁혁신과 발전진흥의 길로 이끌었다. 40여년 동안 그의 인솔하에 기업은 단일경영에서 제약, 도로, 증권 등 여러 분야를 어우르는 현대화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2015년말까지 회사의 총자산은 1996년 상장 전의 4억 2100만원에서 198억 3400만원, 그해의 47배로 증가했고 순자산은 2억 4300만원에서 173억 7900만원, 그해의 72배로 증가했다. 자산부채률은 11.35%로 자산의 질이 전국 동종업계 앞자리에 올랐으며 루적 판매수입은 187억원에 달하여 중국제약공업 100강 기업으로 성장했다. 리수림은 선후로 전국 5.1로력메달, 전국로력모범, 전국 우수기업가, 제1기, 제2기 전국 의약업계 우수기업가로 선정되였으며 국무원 특별수당금을 받는 기여전문가, 중공중앙 조직부 직속관리 전문가, 길림성 고급전문가 등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제9기, 제10기, 제11기, 제12기, 제13기 전국 인대대표이다.
 
리수림은 성실하게 경영하여 진정으로 사회에 가치가 있는 기업을 만들기에 노력했다. 리수림이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사람이 되고 일을 하며 브랜드를 구축하는 과정입니다. 즉 인간을 근본으로 하고 성실하게 경영하며 지조를 중히 여기고 상업 신용과 명예를 수립하는 과정입니다.” 1970년, 사업에 참가한 이래 리수림은 변강을 굳게 지키며 의약건강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집중하여 오동을 지방의 평범한 농간(农垦)기업으로부터 21개의 자회사를 보유한 지주형 그룹 상장회사로 발전시켰다.
그는 종업원들을 이끌고 20여년의 국유기업 개혁실천에서 성공적으로 세차례 기업형태전환을 실현했다. “오동의 발전과정을 돌이켜보면 개혁개방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오동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동의 모든 변혁은 개혁 속에서 혁신되고 혁신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그는 시종 발전으로 모순을 해결하겠다는 소박한 리념을 견지하면서 국가와 사회에 부담을 주지 않았다. 주식제 개조시기에 그는 불량자산을 분리하여 국가에 부담을 떠밀지 않았고 록장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모든 자산을 통털어 전반적인 체제 전환을 진행한 후 나머지 문제들은 발전을 통해 해결했다. 오동 체제기제를 전환시키는 과정에 리수림은 시종 성실하고 신용을 지키는 소박한 리념으로 발전과정에 야기된 문제를 처리했다. 첫째, 채무를 도피하지 않고 력사적으로 루적된 대출과 채무를 전부 상환했으며 나라에 한푼의 손실도 조성하지 않았다. 둘째, 종업원을 정리, 해고하는 일이 없이 전부 개편 후의 새 회사에 취직시켰고 지난 20년간의 수백명 내부퇴직인원의 로임을 전부 새 회사에서 부담하여 사회에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았다. 셋째, 회사의 합병과 개편, 지분참여기업에 대한 투자 등에서 시종 변방을 근거지로 한다는 원칙을 견지하여 돈화에서 선후로 서화목업, 력원약업, 개발구 야풍회사 등 3개 기업을 합병하여 지방정부의 부담을 분담하고 금융위험을 방지, 해소했다.
그는 마음을 연변에 두고 고향경제의 안정적인 발전을 추동했다. 길림오동은 시종 습근평 총서기의 요구를 명심하고 ‘하나의 약으로 두 생명을 살린다’는 경영리념을 확고히 수립했는데 하나는 환자의 생명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기업의 생명을 가리킨다. 제품의 질을 엄격하게 점검하여 매 한알의 약, 매 종류의 약이 모두 안전하고 믿음직스럽게 하며 약품 품질 보장의식을 매 오동사람들의 마음속에 확고히 심어주었다.
리수림은 시종일관 연변에 립각하여 발전을 도모했으며 일생동안 오동에만 머물면서 의약주업을 발전시키고 광발증권의 풍부한 투자수익으로 의약건강산업을 발전시켰다. 오동은 의약건강산업을 핵심으로 하는 돈화오동공업원, 국약대상을 위주로 하는 연길고신과학기술제약원, 현대식물화학약을 위주로 하는 조남생산기지를 건설하여 전국의약업계를 선도하는 지능제조플랫폼을 형성함으로써 길림오동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당지 상하류 산업의 확대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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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봉걸(1966-)
녀, 200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2010년 7월, 길림성 돈화시 대석두진 삼도하자촌 당지부 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 주부련회 겸직 부주석으로 활동했다. 10여년래 곡봉걸은 촌민들을 이끌고 빈곤에서 벗어나 초요사회로 나아가게 하여 광범한 촌민들의 애대를 받았다. 곡봉걸은 2012년에 길림성 우수공산당원, 연변주 로력모범 칭호를 수여받았고 2013년에는 ‘제5회 연변주 10대 녀걸’, 2014년에는 길림성 로력모범, ‘연변주 10대 아름다운 촌간부’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2017년에는 전국녀성공헌기준병으로 선정되였다. 2018년에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으며 2019년에 길림성 특등로력모범, 2020년에 전국로력모범으로 선정되였다. 2020년 4월, 주당위, 주정부에서는 ‘곡봉걸 동지 따라배우기 활동을 전개할 데 관한 결정’을 발부했다.
 
삼도하자촌에서 나고 자랐다는 건 곡봉걸이 줄곧 자부심으로 느껴온 일이다. 수십년래 북경, 심수를 거쳐 상해까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으나 끝까지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뿌리를 내리게 한 곳은 영원히 삼도하자촌과 그 촌민들이였다.
곡봉걸의 남편은 삼도하자촌 전임 당지부서기로 12년간 마을에서 사업했다. 2010년 5월, 그의 남편이 갑자기 심장병이 발작하여 촌민위원회 사무실의 일터에서 쓰러졌다. 남편이 사망한 지 얼마 안되여 ‘동네기둥’을 잃은 촌민들은 집으로 찾아와 그녀에게 서기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한쪽은 ‘소가정’이고 다른 한쪽은 ‘대가정’이다. 촌민들의 간절한 눈빛과 남편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사업을 생각하던 곡봉걸은 망설임 끝에 결국 도시의 번듯한 장사를 접고 남편이 남긴 계주봉을 이어받아 삼도하자촌 촌민위원회 주임의 책임을 짊어졌다. 후에는 촌당지부 서기도 맡게 되였다.
곡봉걸은 진심으로 마을 사람들을 가족으로, 빈곤호를 친인으로 여겼다. 2010년 7월, 곡봉걸은 산동성 농촌에 가서 학습, 고찰하는 일정을 앞두고 있었다. 출발 며칠 전, 그녀는 홍수철이 당금이라 마을의 물길을 정리하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촌에는 뚝을 보수할 여유돈이 없었다. 곡봉걸은 갖은 방법 끝에 삼도하자촌에 세 들어 사는 한 공사 사장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굴착기로 나흘 동안 꼬박 작업을 한 끝에 물길이 깨끗하게 정돈되고 제방을 1메터 더 높게 튼튼히 쌓았다. 곡봉걸은 그제서야 시름 놓고 학습을 떠났다. 그 뒤 전 성 범위의 ‘7.28’ 폭우 속에서도 삼도하차촌은 무사할 수 있었다.
삼도하자촌은 600여명 주민이 모여사는 작은 마을이다. 빈곤해탈 난관공략전이 시작되자 곡봉걸은 마을의 5가구의 빈곤호를 서류작성 빈곤호에 포함시키고 정부에서 규정한 빈곤퇴치 사업임무를 완수하는 동시에 여전히 자기 농사 수입에서 일부를 덜어 그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 보탰다. 10년 동안 곡봉걸은 빈곤호를 돕는 데 물품 및 자금 15만여원을 지원했다.
곡봉걸의 지도하에 삼도하자촌에서는 선후로 돈화시 곡풍콩옥수수재배전문합작사와 돈화시 대석두진 삼하부민알업전문합작사를 세웠는데 사원들은 자체 재배로 소득을 얻고 합작사의 리윤까지 나눠가지며 해마다 3000여원의 수입이 증가되였다.
2015년부터 곡봉걸은 자신의 사비를 털어 촌민들을 이끌고 대상 고찰에 나섰다. 고찰과정에 그는 소를 기르는 것이 자기 마을 발전에 적합한 좋은 대상임을 깊이 느끼고 촌민들에게 그 효과성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앞장서서 소를 길렀다. 어느덧 농민들의 지갑이 점점 두둑해졌고 ‘소마을’이라는 명성도 갈수록 높아졌다. 현재까지 마을의 160여가구에서 사육중인 소는 2000여마리이다.
산업이 자리를 잡자 곡봉걸은 촌면모와 향풍 건설에 눈길을 돌렸다. ‘시설이 완비하고 기능이 완벽하며 네트워크 련결망을 형성하고 축산을 분리한’ 신형 향촌생태분포를 구축한 동시에 곡봉걸은 마을에서 ‘깨끗한 가정’을 건설하여 빈곤해탈 난관공략전을 추진했으며 촌민의 생활 질을 한층 더 높이고 군중들의 생활환경과 정신면모를 개선했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사명》에서 발취
(다음호 계속)
작가: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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