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민의 ‘미더운 며느리’


날짜 2022-06-15 15:04:03 조회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 대표의 영광을 지닌 안향숙(61세)을 두고 주변에서는 마을 독거로인들의 ‘미더운 며느리’라고 정겹게 불러준다. 그동안 그녀가 받아안은 우수공산당원, ‘서민뢰봉’, 무순시 10대 자선인물 등 영예만 봐도 짐작이 간다.
그녀가 왕청문진 왕선촌 부녀주임에 이어 촌민위원회 주임, 촌당지부 서기를 지내는 사이 마을의 많은 젊은이들이 외지로 빠져나가면서 촌에는 로약자나 독거로인들만 남게 되였다. 공산당원이며 촌부녀주임이였던 그녀에게는 어떻게 독거로인들을 보살펴가면서 촌민들의 행복지수를 늘이는가가 늘 앞선 과제로 되였다.
필자가《중국조선족백년실록》편찬사업의 일환으로 무순시 신빈만족자치현에 찾아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 나이 50대 중반이였다. 허리를 질끈 동여맨 검은색 잠바에 거뜬하게 깎아올린 단발머리, 크림이나 립스틱은 아예 바르지 않은 맨얼굴에 유난히 커보이는 두 눈에서 모진 풍상을 버텨온 세월의 흔적들이 은근히 엿보였다.
백산시 교외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여나 고향에서 소학교, 초중을 졸업한 안향숙은 마을의 단지부서기에 민병련장을 맡아하다가 도회지로 옮겼다고 한다. 그 후 소개로 왕청문진에 사는 김씨 성을 가진 젊은이와 인연을 맺게 되여 23살에 왕청문진으로 시집오게 되였다고 한다.
그녀가 새로운 인생설계도를 그려나가려는 때에 예상치 못한 불상사가 생겼다. 린근에 사는 남편의 삼촌이 가출하여 행방불명이 된 데다 페결핵으로 심하게 앓고 있던 삼촌댁까지 드러눕게 되였다. 삼촌댁은 운명을 앞두고 시조카인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부디 세 딸들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결국 안향숙은 어린 시조카 셋과 4천원이 넘는 치료비마저 떠안게 되였다. 거기에 로인성 질환으로 앞을 못 보는 70 고령의 시할머니 병시중까지 하면서 살아야 했다.
오막살이나 다름없는 초가집에 여섯 식구가 오글대면서 그래도 살아보려고 대부금을 내서 암소 한마리 산 후 논도 남보다 곱절 더 부치고 그것도 성차지 않아 산속에 들어가 인삼재배도 시작했다.
4년 고생 끝에 드디여 빚을 청산하고 이젠 허리를 펴도 되겠다고 생각하던 때 예상치 못한 불행이 찾아왔다. 몇년째 인삼재배밭에서 살다 싶이 일하던 남편이 갑자기 드러누웠다. 단순한 과로로 생각하고 휴식을 좀 취하면 호전될 거라 생각했는데 점점 악화되는 듯싶어 지방병원에 찾아가 보였더니 의사는 크게 놀라며 당장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무순시광무국병원에 찾아가 전면검진을 했는데 최종 간암에 이선염, 십이지장궤양에 담낭염까지 오만가지 병이 뛰쳐나왔다.
그녀는 남편을 살려내려는 일념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꿔가며 수술을 받았다. 8시간의 긴 수술을 거쳐 떼여낼 건 떼여내고 이식할 건 이식하는 식으로 일단 목숨은 부지했다. 수술이 잘되였다고는 하는데 담낭관의식에 문제가 생겨 재수술을 받다 보니 돈은 예산보다 곱절 더 들어갔다.
남편은 3년간 병원신세를 지고 퇴원했다. 하지만 중환자이다 보니 씻기고 돌아눕히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과는 오로지 그녀 몫이였다. 거기에 시할머니까지 드러누워 중환자 두명을 돌보면서 집안일을 전담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걸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불평 한마디 없이 정성을 쏟아부었다. 남편의 기력회복과 소염에 좋다는 건 서슴지 않고 강구해보았다.
정성이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남편은 차츰 원기를 회복해 바깥출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치료 때문에 진 빚과 리자가 새끼를 쳐 우선은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하여 혼자서 30헥타르 되는 논을 도급맡아 낮에는 병시중에 집안살림을 하고 밤이면 남의 집 소를 빌려 써레를 놓고 모내기를 하면서 버텨왔다. 야밤에 소가 도망가 논판을 헤매고 다닌 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문제는 죽기내기로 버텨봤자 년말에 리자나 메우는 정도였다. 사람은 살려냈는데 빚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고민 끝에 그녀는 모든 걸 내려놓고 산업연수생으로 해외로무를 다녀오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녀가 외국의 모 반도체회사에 취직했을 때가 아세아경제위기가 터진 뒤여서 로임도 높지 못했다. 하여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야간근무도 지원했다. 그러다 보니 맨날 오밤중에 퇴근해서는 샤와도 못하고 꼬꾸라졌다가는 다시 눈이 떠지면 일하러 나가군 했다. 이렇게 2년간 해외에서 죽기내기로 돈을 모아 남은 빚을 다 청산하였다.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가한 안향숙.

1983년에 왕청문진으로 시집와서 3년이 지나 단지부 서기에 부녀주임 중임을 맡아왔고 2003년부터는 촌당지부 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직을 맡아왔던 그녀는 다사다난했던 가정의 중임을 떠메고 살면서도 시종 마을의 리더로서의 역할과 책임에 충실했다.
1986년, 왕청문진에 조선족로년협회가 설립되였는데 전 성 치고도 처음으로 설립된 로년협회였다. 그녀는 그 바쁜 와중에 협회 설립을 주도해왔고 또 다양한 활동을 펼쳐 전 성 로년사업 모식을 만들어냈다. 그 뒤를 이어 거의 비슷한 모식의 로년협회가 전 성 마을마다 하나둘 생겨났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가다 보니 마을에는 로약자들이나 독거로인들만 남았다. 마을의 부녀사업을 책임진 그녀로서는 내 부모, 내 남편만 챙긴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일단은 힘이 닿는 대로 독거로인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독거로인들은 쌀이 떨어져도 그녀를 찾았고 몸이 불편해도 그녀부터 찾았다. 마을로인들도 그녀 사정을 다 알고 있었지만 의지할 만한 데가 온 마을에 그녀 뿐이였으니 말이다.
그러던 그녀가 2년간 산업연수로 해외로무를 다녀오는 동안 집사람들보다는 마을 로인들이 더더구나 그녀를 손꼽아 기다려왔다. 어느 날 그녀가 돌아왔다고 하니 마을 10여명 로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그녀를 찾아왔다. 다들 많이 보고 싶었다면서 부녀주임이 돌아왔으니 이젠 마을이 활기를 되찾게 되였다며 너도나도 한마디 했다.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임을 그녀는 페부로 느꼈다.
그때부터 그녀의 일과는 새벽 4시만 되면 마을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집한집 참빗질해보면서 간밤에 무사했는지를 점검한다. 특히 한겨울 아침 6, 7시가 되도록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으면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라고 했다. 찾아들어가 보면 아닌 게 아니라 독감에 걸려 운신을 못하거나 넘어져 골절이 생겼거나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23살 꽃나이에 왕청문에 시집와서 40년 가까이 한 가정의 어머니로, 한 남편의 안해로, 한 마을의 ‘며느리’로 동분서주해온 그녀… 어언 중년을 훌쩍 넘긴 그녀의 남은 여생에 꽃길만 펼쳐지기만을 기대해본다.
작가:김창석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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