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로병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이가 지금도 살아계셨다면 올해 91세였을 것이다. 19세 되던 해 항미원조전쟁이 발발하자 심가유는 주저없이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했고 압록강을 건너 전장으로 달려갔다. 입대한 지 반년,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어머님이 병으로 앓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적혀있었다. 뼈저린 슬픔을 참으며 이마를 땅에 조아려 고향을 향해 절을 세번 했다. 군인이며 당원으로서의 책임감은 그를 계속해서 적군을 향해 전진하도록 밀어주었다. 눈물을 닦고 의젓이 전쟁터에 뛰여들어 그는 조국과 인민을 지키기 위해 적들과 용감하게 싸웠다.
몸에 걸쳤던 군복은 그의 일생의 영광이였다. 가렬처절한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제대 후 후반생을 거의 침대 우에서 보냈다. 그의 오른쪽 다리에는 총상 흔적이 남아있고 왼쪽 눈은 실명되였다. 하지만 로동력을 잃고 고단한 생활을 하고 있어도 당과 나라에 페를 끼치지 않으려 했고 심지어 국가에서 주는 대우도 마다했다. 정부에서 로전사인 그에게 새 집을 지어주려는데 역시 사양했고 명절마다 정부에서 문안을 오면서 가져다준 쌀, 밀가루와 식용유도 모두 생활이 어려운 군중에게 나눠줬다. 주변에서 그를 영웅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는 “진정한 영웅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저 로병일 뿐입니다.”고 말했다. 국가정책이 좋아 로전사들이 입원하면 치료비용을 받지 않지만 87세까지 그는 단 한번도 입원치료를 받지 않았다.
“전우들은 적들과 싸우며 포탄에 목숨을 잃고 추위에 얼어 희생되였는데 나는 지금까지 잘 살아있지. 지금은 몸상태 때문에 기여는 못하지만 당과 국가에 페를 끼쳐서는 안돼…” 병이 위중할 때마다 가족들은 하나같이 입원을 권유했지만 그는 항상 이렇게 거절했다. 한번은 병으로 인해 의식을 잃었고 구급차를 불러 급히 병원으로 이송하는 도중에 깨여난 그는 자기가 병원으로 향하는 구급차에 실려있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다시 집에 돌아가도록 했다. 그날 밤, 그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스스로의 안위를 돌보지 않으며 조국과 인민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로전사, 68년 당년한을 가진 이 로전사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자 나를 애지중지 아껴주셨던 나의 외할아버지이다. 외할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줄곧 내 이름을 외우셨다고 했다. 그때 가족들이 나한테 돌아오라는 전화를 걸었는데 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외할아버지가 고개를 힘껏 저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당시 내가 돈화시를 대표해 진행하게 될 간호기능조작업무 시합을 위해 합숙 훈련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또 한번 감정을 억누르고 늘 그랬던 것처럼 단체의 영예를 첫자리에 놓았다. 돈화시에서 유수시까지 308킬로메터의 거리를 두고 결국 나는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한평생 당원과 군인의 표준으로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하였고 당과 국가에 대한 충성과 사랑은 그의 뼈속까지 스며있었다. 외할아버지의 정신과 신앙, 말과 행동은 시종일관 가족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외할아버지가 떠나신 그해에 나는 입당지원서를 썼다. 외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홍색유전자를 물려받고 위대한 신앙을 전승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년대든지 막론하고 당원의 유일한 특권은 바로 앞장서는 것이다.”고 늘 나에게 가르쳐주었던 외할아버지는 당원의 사명을 나의 마음속에 한번 또 한번 아로새겨줬다.
올해초, 길림성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전염병사태로 인해 많은 자원봉사자가 필요했다. 나는 추호의 망설임 없이 일찌감치 써놓았던 도전장을 바쳤다. “당원으로서 무한에 갈 기회를 놓친 것이 일생의 유감으로 되였는데 이번에는 반드시 일선에 가겠습니다.” 며칠 후 훈련을 마치고 나는 확진자 발생 건물의 선봉대 대장으로 되였다. 정월 초사흗날 아침, 집집마다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화기애애하게 설날을 보내고 있을 때 나는 긴급 임무수행 통지를 받고 한시간 뒤 짐을 싸서 목적지로 집합해야 했다. 급히 짐을 챙기는 나를 보며 어린 딸애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
“엄마, 설을 보내고 가면 안돼요? 아니면 래일 떠나면 안돼요?”
그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공산당원으로서 반드시 나서야 하지만 이 꼬맹이의 엄마로서는 확실히 불합격이였다.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엄마는 공산당원이야. 지금 바이러스를 물리치러 가야 되는데 엄마가 바이러스를 이기고 바로 돌아올게.”
어린 딸이 잘 리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커서 어른이 되면 충분히 리해하고 엄마의 선택을 지지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꼭 엄마를 따라배워 나라와 인민이 요구할 때 앞장설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처음 방호복을 입고 처음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하면서 생리적 한계에도 도전해보았다. 숨이 막히고 탈수와 저혈당으로 휘청거리면서 힘든 것을 느껴보았지만 한명의 공산당원으로서 나의 마음속에는 늘 전진하도록 지탱해주는 신앙과 힘이 있었기에 끝까지 싸워 이겨낼 수 있었다. 바로 외할아버지처럼 인민을 위해 사심없이 헌신하는 공산당원으로…
당원에게 필요한 것은 영예가 아니라 돌진하는 용기이다. 마치 70여년 전 적들과 맞서 싸운 중국인민지원군과도 같다. 그들은 조국과 인민을 위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압록강을 건너 전장으로 달려갔다. 지금은 세차게 밀려오는 전염병과 맞서 싸우며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목숨을 걸고 나선다. 그들은 인민을 사랑하고 사명을 아로새기며 어려울수록 더욱 힘차게 나아가는 공산당원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길림성 돈화시병원 간호사)